작은 의식, 큰 쉼
SNS를 삭제했다. SNS 대신 차를 끓이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물이 끓는 소리를 그저 지나가는 소음으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그 소리 자체가 작은 음악처럼 들린다. 김이 피어오르고, 찻잎이 물에 젖어가며 서서히 빛깔을 바꾸는 순간, 살아 있다는 자각이 밀려온다. 세상이 알려주는 정보와 남들의 성취가 아닌, 눈앞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이 흐른다.
“돈이 있어야 여유를 누릴 수 있지.”
남편의 말은 절반은 맞다. 생계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면, 차 한 잔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돈만으로는 여유가 완성되지 않는다. 통장에 숫자가 늘어나도 마음은 늘 부족하고, 더 많은 것을 쌓아야 안심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돈은 문을 열어줄 수 있지만, 그 문 너머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여유는 단순히 시간이 남는 상태가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낭비할 뿐이다.” 시간의 부족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삶은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한다. 차를 우려내는 짧은 순간조차 흘려보낼지, 삶을 붙드는 의식으로 삼을지는 선택의 문제다. 여유란 바로 그런 선택에서 태어난다.
동양 철학에서도 같은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장자는 ‘무위(無爲)’를 이야기하며, 억지로 무엇을 쥐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강조했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다. 차를 마시는 행위도 그러하다. 목적을 두지 않고, 그저 차향을 음미하며 잔을 감싸는 순간, 무위의 태도 속에서 진짜 여유를 경험하게 된다.
병상에서 햇살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오늘 햇살이 참 좋다.” 삶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그 순간을 음미하는 태도 속에서 아버지는 여유를 지켜냈다. 햇살은 모두에게 내리지만, 그것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차 한 잔이 그러하듯, 햇살도 결국 마음을 기울일 줄 아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된다.
우리는 흔히 행복과 여유를 거창한 성취에서 찾으려 한다. 큰 집, 안정된 자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업. 그러나 삶을 지탱하는 힘은 손 안의 작은 의식에서 비롯된다. 차를 따르는 순간의 온기, 향을 음미하는 몇 초의 고요, 대화 대신 흘러나오는 침묵조차 깊은 쉼이 된다. 행복은 큰 사건이 아니라, 이렇게 반복되는 사소한 행위 속에서 다져진다.
여유는 돈이 많아야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여유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인간은 단순히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유하는 존재다. 차를 마시는 작은 의식은 바로 그 사유의 시간을 열어준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멈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짧은 창이 된다.
남편의 말은 맞기도 하고, 동시에 틀리기도 하다. 돈이 여유의 문을 열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안을 채우는 것은 마음가짐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을 가르쳐주는 가장 좋은 스승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손 안의 작은 찻잔이다. 잔을 들며 깨닫는다. 여유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에 놓여 있는 것임을.
차를 우려내는 작은 행위가 곧 하나의 예술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특별한 무대 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빛을 기록하고, 감정을 새기며, 기억을 남기는 손길 속에서 일상의 시간을 붙든다. 찻잔을 감싸 쥐는 순간이 그러하듯,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도 삶을 온전히 바라보게 한다. 결국 예술은 묻는다.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고,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당신의 하루에 건네는 작은 질문
1. 오늘, 마음이 진짜 머물렀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오늘 마음이 가장 편안했던 순간:
오늘 나를 웃게 한 순간:
2. 되돌릴 수 있다면 더 오래 붙들고 싶은 순간은 무엇인가요?
기억하고 싶은 장면:
마음을 조금 더 기울였더라면 발견했을 행복:
3. 여유는 돈이나 시간에서만 오는 걸까요? 아니면 차 한 잔의 온기 속, 햇살 속, 혹은 마음을 기울일 줄 아는 순간에서 비롯되기도 할까요?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서 찾은 여유:
바쁘게 흘러가는 하루 속, 내가 놓친 여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