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놀이 2부

9. 헤어질 결심

by 운정

어느 날 그녀는 헤어질 결심을 했다.

관심을 두지 않고 그대로 놔두어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붙들고 씨름해 온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불안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불안 속에서 무서운 밤을 보냈고 그 공포와 두려움을 피하려 도망 다니며 부정하고 학대하며 상처는 상처로 치유한다는 미신적 신념이었는지 자신을 괴롭혀왔다.

전신에 전율을 일으키는 불안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진원지가 어딘지도 모르기에 더욱 힘들었다.

자신을 어둠으로 몰았던 덧붙인 생각과 그에 따른 몸의 반응들을 털어 내기 시작하자 어딘가에 박혀있는 부정적 편린들이 가시처럼 돋아나 격렬하게 저항했다. 눈이 뒤집히고 감기며 해리성 공황증상이 덮쳐왔다.

그녀는 안심공간인 상담실에서 더욱더 격렬하게 자신과 싸워내고 있었다.

더듬더듬 거리며 내 손을 잡거나 두 팔로 소파 쿠션을 꼭 잡아 안고 손바닥으로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두발을 바닥에 꾹 닿게 하고 몸을 펴 들며 그것들을 직면해야 했다.

긴 숨을 쉬며 평시를 하라는 나의 지시에 따라 눈을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초점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고정되기 시작하면 자신으로 돌아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녀의 불안이 조금 잦아들기 시작하면 예외 없이 우울과 무기력감이 덮쳐왔다.

눈물이 끝이 없을 것처럼 흘러내렸다. 불안이 잦아들면 우울감이 밀려왔다. 그것을 직면하고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울음과 저 아래뱃속 깊이에서 올라오는 동물의 소리같기도 한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질러 내었다.

눈물이 그치고 목소리가 돌아오면 말수 없던 그녀가 자기의 언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불안과 우울이 차례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느낌을 묘사했다. 그녀의 묘사는 아주 세밀하고 내밀하였다.

그녀만의 감각언어는 신비로울 정도로 놀라웠다.

언제 저런 언어를 내면에 쟁여두었을까 싶도록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그림자가 보여요. 그림자가 흐느적거려요. 그림자는 제가 만들어 낸 상상일까요? 아니면 저의 내면의 반영일까요?"


그녀는 불안, 그리고 우울을 걷어내고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우울과 불안 속에서 존재의 흔들림을 느꼈다면 이제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감각세포의 떨림 속에 머물렀다. 수많은 날, 우울 불안이 그녀를 지치게 하고 에너지를 소진하게 했지만 이제는 우울하고 불안한 자신을 수용했다.

그리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도 스스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정적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이미 그녀는 나를 만나기 전부터 자신의 내면 여행을 하고 있었다.

불안을 피해 도망 다니며 에너지 소진으로 기운이 빠지지만 않는다면 그녀의 내면 여행은 아마도 앞으로 계속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무에게 말하지 못한 이야기에 대해 괴물로 묘사했다.


"그 괴물보다 이제 제가 더 커진 것을 알아요. 그 괴물이 이제 더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도 알아요. 궁금한 게 있어요, 선생님,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어쩔 때는 오히려 그 괴물이 저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괴물을 보내기가 싫은 걸까요?"


그녀에게 그 괴물의 이름을 지어주게 했다. 그녀는 검은 색을 물에 흘려놓은 듯 회색빛으로 흐릿하고 촉감은 축축하고 물렁하며 조금 차고 얇으면서 물컹한 느낌이 드니 '흐물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괴물 '흐물이'는 그렇게 흐믈흐믈거리며 그녀의 주변에 머물렀다. 그녀가 괴물과 헤어질 결심을 하며 성심껏 집중하고 관심을 기울이자 흐물이는 점점 더 단단하고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그림자였다.

그녀에게 지금 여기에서 보이는 것과 느끼는 모든 것을 글로 적어보게 했다.


'나는 너의 내면에서 너를 지키고 바라보는 존재야. 무서워하지 마. 나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어. 네가 괴물이라 이름을 붙인 순간부터 괴물이 되었지. 나는 너야. 네가 나를 외면하고 버려두었을 때 난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어. 그래, 나는 너의 그림자야. 그리고 너야.'


그녀는 새로운 영혼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음악을 듣기 시작했으며 야트막한 산길을 걸었고 맑은 물을 마시고 깨끗하고 신선한 음식을 섭취하며 자신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다. 그녀의 내면에 살고 있던 괴물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니라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살아 움직이는 또 하나의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면의 자아라 불리는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와 색감과 향을 가지고 그녀의 내면에 머물렀다. 그녀의 내면의 빛과 색은 달라졌고 그녀의 얼굴빛, 표정, 몸짓과 행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우 영특하고 기민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감각의 예민함은 말과 글로 묘사할 때 극강의 표현력을 발휘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빨려 들어가며 나는 어느덧 그녀의 심상 속에서 함께 여행을 했다. 그녀는 특히 자기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거렸다. 때로는 괴물을 피하려고 그녀의 마음은 분주했고 길을 잃은 적도 있었지만 그녀 특유의 예민한 감각으로 내면의 갈 길을 찾아내 밝은 빛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인도하는 생각의 길과 감정의 길을 따라 함께 걸었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어둠과 빛이 교차하고 물과 불이 만나며 무지갯빛이 펼쳐졌다.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그림자놀이 해본 적 있어요? 저는 어릴 때 동생과 마당에서 해가 지면 그림자 잡기 놀이를 해요. 동생의 그림자를 제가 잡고 동생은 제 그림자를 잡으러 다녀요. 화단을 가운데 두고 마당가를 돌며 그림자를 잡으려 수없이 뺑뺑이를 돌죠. 그러다 지쳐서 화단에 앉아요. 그러면 그림자도 저를 따라 앉아요. 제 그림자는 저를 따라 하고 동생의 그림자는 동생을 따라 하는 거예요. 가만히 그림자를 응시해 보았어요. 그것을 왜 잊어버렸을까요? 그림자는 나였는데."


그녀는 상담 마치는 시간이 되면 신체적 감각과 욕구가 돌아오면서 몹시 허기져했다.


"배가 많이 고파요. 같이 식사하실래요?"


어느날, 그녀는 허기지고 헬쑥하지만 눈빛을 반짝거리며 소녀처럼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담에요, 상담이 종료되고 우리가 더 이상 상담자와 내담자가 아닐 때 그때 하기로 해요."


나도 그러고 싶다는 듯이 코를 찡긋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지우가 1층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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