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놀이 2부

8. 그 길 끝에는

by 운정


"자기 어린애 같은 거 알아? 왜 그리 신나?"


사무실 바닥 여기저기 쌓여있는 책들을 ㄱㄴㄷ(ABC) 순으로 라벨링 하면서 흥얼거리고 있었다.

지우는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왜 그리 신났을까?" 내가 되물었다.


마음그늘이라 상담실 이름을 붙인 것을 두고 지인들은 설왕설래를 했다.

마음그늘이 있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고 너무 대놓고 그러면 누가 오겠냐고 하며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는 선배도 있었다. 마음 놓고 마음그늘 속에 들어가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생활공간 속에서 가능한 일이 아님은 마음그늘을 가진 사람들은 안다. 유학을 가기 전까지는 나 또한 나의 마음그늘 속으로 마음 놓고 들어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 동료와 함께하는 공간에서 마음껏 마음그늘 아래로 들어가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병명을 진단을 받으면 대체로 사람들은 병증상이 절반은 줄어들기도 한다.


의사 또는 임상심리사가 '당신은 우울증으로 보입니다.' 하며 '우울증' 진단명을 확인하면 내담자는 조금은 죄책감이나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자신을 보게 된다. '나 우울증이라서 그런 거야.' 하며 자신의 마음그늘 속에 들어간다. 상담실 '마음그늘'이라는 이름에는 마음껏 마음그늘에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곳이란 의미가 숨어 있다. 자기 마음을 마음껏 느끼고 바라보고 노니는 공간이 바로 '마음그늘'이 되길 바랐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마음껏 우울하고 슬퍼하고 비통해하며 울부짖을 시간이나 공간의 확보가 어렵다.

마음에 아무 일이 안 일어난 척, 마음의 상처가 없는 척, 더 나아가 마음이 없는 척하기 바빠 어딘가 고장이 난 줄도 모르고 방치하기 십상이다.

마음그늘 상담실의 문과 벽은 두껍게 거의 완벽 방음처리했다.

마음그늘 속에서 안심하고 마음껏 마음을 꺼내 놓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니 이 공간은 내가 마음껏 놀 수 있는 놀이 턴데 어찌 신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똑똑, 노크소리가 났다.

오전 11시 예약한 내담자였다.


그녀는 눈과 얼굴 표정에 한가득 '나 아파요.'를 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여기에 왜 왔는지 갑자기 머리가 멈춘 듯 멍한 표정이었다.

따뜻한 카모마일차 한잔 내려 앞에 앉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있다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슨 말을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대로 두었다. 그녀는 백지장같이 하얗고 선이 고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하면서 맑았다. 이 동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듯 고급 양모니트원피스에 갈색 밍크 반코트를 입었고 고상한 색조의 H사 토트백을 들고 방문을 했다. 너무 마른 몸매는 그녀의 우아함을 다 담아내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그녀에게 친근함이 느껴지는 것은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일어서려는지 옆에 둔 가방에 손을 대자 나는 말했다.


"오늘은 편하게 음악이나 들어요. 어렵게 오셨는데.. 한곡만 듣고 나서 언제든지 가고 싶을 때 가셔도 돼요."


그녀가 올리려던 상체를 다시 소파에 내려놓자, 나는 일어나 블루투스를 켜고 음악을 검색했다.

자장가로 들려주면 모든 아기들이 울다 잠든다는 그 곡, '섬집 아기',

용재오닐은 울기에 최강의 연주를 하는 비올리스트였다.


그녀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간간이 어깨를 들썩였고 가끔 긴 한숨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소파에 기대있다 그대로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족히 3~4인용 앉을 수 있는 소파를 산 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신발을 벗겨주고 두 발을 소파 위에 올려 주는데도 그녀는 새근새근 잠을 잤다. 그녀의 안정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켜고 모처럼 나도 편안하게 음악감상에 젖어들었다.

4악장 아다지에토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그녀가 깨어났다.


그녀는 일어나며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어머, 어머, 내가 여기서 얼마나 잔 거예요? 제가 실수한 거죠?"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웃기는 나의 웃음소리에 그녀도 멋쩍게 따라 웃었다.


"저는 요, 미정 씨가 여기서 이렇게 잘 자는 거 보니 저도 여기서 잠을 자야겠구나 싶었어요. 하하. 괜찮아요. 상담시간 딱 지켜서 일어나셨어요. 소파에서 자고 일어난 얼굴이 이렇게 예쁠 수 있는 거예요?"


"아니에요. 죄송해요. 가볼게요. 다음 주 이 시간에 예약해 주세요. 정말 미안해요."


"상담실에 오기로 마음먹고 온 것만으로도 이미 상담이 시작된 거예요.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고 저에게 미안해할 일은 아니에요. 그럼 담주에 뵙기로 해요."


그녀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가야 할 그 길의 중간에 그리고 끝너머에 밝은 가로등이 촘촘히 켜 있기를, 그녀가 내딛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그녀가 안심하고 진입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그녀의 삶의 여정에서 앞에서만 비추던 빛이 그녀의 등 뒤에서 비춰주어 그녀 앞에 명확하게 그림자가 드러나기를 바랐다. 그것이 결코 괴물이 아니라 그녀의 또 다른 모습임을 스스로 알기까지 그리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기까지 나는 그녀 옆에 함께 있었다.




구스타프 말러 Symphony No. 5

https://youtu.be/oNjmv9PVIfM?si=XM3LkuJNi1yXlJNS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17화(소설) 그림자놀이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