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마음그늘'상담소를 오픈한다는 소식은 동문들에게 빠르게 퍼져나갔는지 오픈식다운 오픈식을 하지 않았음에도 여기저기서 화분이 배달되어 왔다. 몇 개는 지우가 자원봉사하는 병원에 기증하고 작은 화분 몇 개만 책장 사이사이에 배치해 놓았다. 화분마다 지인임을 알 수 있는 연관된 이름이 달려 있었다. 일일이 확인하고 노트했다. 꽃보기가 그리 어렵다는 극락조꽃이 피어 있는 화분이 눈에 띄었다.
'윤필상', '마음그늘에서 편안하기를...'
한교수가 동문들과 밥 한 번 먹자고 했지만 간곡히 나중으로 미루었다.
그가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소식은 나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적어도 월수금 세 번은 교양학부 심리학 개론을 가르치러 학교에 갈 테니 그와 부딪히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한교수가 가르쳐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저 김정선이에요."
그와 10년 동안 미뤄두었던 작별을 해야 했다.
그를 잊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안온한 무릎에 베고 누워 눈을 감고 그의 손길과 체취를 느꼈다. 그의 부재가 주는 쓸쓸함과 허전함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가슴 한편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묵직한 덩어리가 다시 살아나 움직였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만져지던 그의 턱선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 점점 눈물은 마르고 가슴에 묵직한 덩어리가 얹어졌다. 나는 다시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학교로 돌아가 다시 논문을 시작했다.
그의 얼굴, 숨소리, 표정은 교내 구석구석 어디에나 있었다.
잊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든다는 것, 그것은 초감각적인 미세함으로 느낌 속에 머무른다는 것, 저 밑바닥에서 퍼올리는 썩어 냄새나는 오물을 들이켜는 듯한 모멸감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해진 나의 몰골을 걱정했다. 몸이 아파서 휴학을 했으니 선후배들은 나를 짠하게 바라보았다. 병명으로 숨는 것은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인간의 몰골을 포기하고 1년 6개월 동안 책과 논문에 파묻혀 지내는 동안 그와의 시간들은 꿈으로 밀려나 나의 무의식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듯했다.
1층 카페로 들어서니 카우치에 앉은 그의 등이 보였다.
해랑이 맑은 소리로 '안녕하세요? 선생님'하며 인사를 했다.
눈으로 웃으며 고개를 까딱하고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자리에 가져다주겠다는 해랑이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그가 앉은자리로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10년의 시간의 강을 건너 그는 중년의 풍모를 갖추고 있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잘 지냈어?... 먼저 전화해 줘서 고마워."
지우와 뉴욕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고 사랑하고 마주 보며 소리 내어 웃으며 덩어리 진 마음이 사라진 줄 알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랑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그와 나를 힐끔거렸다.
온몸이 굳어지는 듯 가슴이 조이고 숨이 가빠왔다.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할까?"
간신히 도리질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의 내면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왜 나를 버려두고 갔나요?,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내가 작별인사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었나요? 마지막 전화 그건 뭔가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기는 한건가요? 그게 사랑인가요? 당신에게 난 외롭고 힘든 시절을 보내기 위한 수단이었나요? 그렇게 갔으면 잘 살았어야지, 왜 이혼은 하고 그래요?'
나도 모르게 큰 숨을 내쉬며 눈물이 주룩 흘렀다.
깜짝 놀라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얼른 검지로 훔쳐 닦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따뜻한 카페 라테의 커피 향이 부드러웠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는... 당신과 정식으로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서예요.'
이 말을 해야 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가슴은 먹먹해졌다.
"미안해요. 이렇게 만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머리를 도리질을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페 옆문으로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갈길을 잃은 다리는 후들거렸고 가슴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3층을 지날 때쯤, 계단을 오르는 게 이렇게 힘겨운 것이었나? 하는 사이, 그가 내 앞에 막아서서 내 어깨를 잡아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 정선아, 미안해. 사랑해, 사랑해."
그의 숨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히며 소리를 내쉬었다.
'사랑해'라는 소리를 듣자, 이내 가슴이 진정되고 정신이 또렸해졌다.
그를 밀치며 말했다.
"네, 분명해졌어요. 당신에게 그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당신에게 작별을 고할 날을 기다려 왔다는 것을요. 당신이 보낸 극락조의 꽃부리의 날카로움이 날 일깨워주 더고요. 당신의 사랑은 아픔이란 것을요."
멍하니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며 총총히 천천히 한 계단 한 계단 세며 나의 상담실을 향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