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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좋은 나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by 벨리따

25년 첫 수업. 체험 수업에 세 명 신청했다. 그들은, 오늘 수업을 통해서 여기서 계속 배울지 아닐지를 결정한다.

두 명은 원주의 풋살 클럽 소속이다. 우리와 같이 배우는 수강생 한 명 역시 어느 클럽에 속해있는데 경기를 뛰어 본 적 있어서 알아봤다. 꽤 잘한다고 했다.

한 명은 이제 스무 살이라고 했다. 보통 친구, 지인끼리 오면 그들끼리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궁금하면 물어도 볼 텐데 그렇지 않다. 나는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와 같이 공 컨트롤과 패스 연습을 했다. 패스가 정확하거나, 컨트롤이 잘 될 때는 “우와!” 또는 “나이스”라 하기도 했다. 미니 경기 때 그녀와는 다른 팀이었다. 내 앞에서 골을 넣었을 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쳤다. 박수 한 번 치고 나서 알았다. ‘아, 맞다. 나 상대 팀이지.’

두 명은 볼 컨트롤, 속도, 자세가 다르다. 끊기지 않고 쭉쭉 나간다. 어떤 연습을 하는 건지도 알고 바로 해낸다. 미니 경기를 할 때는 움직임도 달랐고, 공간으로 패스를 하는 것도 쉽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무 살 친구도 만만치 않다. 몸싸움을 잘한다. 호리호리, 여리여리하게 생겼는데 어깨로 밀고 들어온다. 힘도 있다. 처음에 스텝 할 때부터 해 본 사람 같았다. 컨트롤과 패스 연습할 때, 처음인데도 괜찮았고.

미니 경기 전에 잠깐 대화를 나눴다. 해 본 적은 있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물었다. 스무 살이라는 말에 내가 놀라자, 나보고 ‘내 또래’가 아니냐며 묻는다. 두 배 많다고 했다.

스무 살. 나는 내 나이를 스무 살까지만 기억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올해 몇 살이냐고 물었을 때 나이로 대답한 건 스무 살 까지라는 말이다. 첫 해외여행은 대학교 졸업하기 전에 다녀왔고, 첫 취업은 2007년에 했다. 결혼은 2014년도에 했다. 2015년, 2017년에 아이를 출산했다. 원주로 이사 온 건 2021년도다. 굵직한 사건은 학년과 연도로 기억하고 있다. 이제, 누가 내 나이를 물어보면 84년생이라고 한다. 듣는 사람이 알아서 계산해 언니, 동생이라며 얘기한다.


이십 대에 내가 가장 좋아한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이십 대는 젊고, 삼십 대는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다. 이십 대 초반은 아직 사람, 일 경험이 부족하지만 중반은 경험이 쌓인 시기라 여겼다. 마냥 어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이가 많지도 않으며, 적당한 경험이 있어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이가 바로 스물일곱이었다. 스물다섯 살부터 나이 먹는 게 좋았다. 여성으로서 절정의 시기라 생각했다.

‘가장 예쁜 나이’라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살을 빼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나이 전후로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냥 들었던 말은 아니다. 나도 노력이라는 걸 했다. 내가 좋아하는, 나한테 어울리는 옷을 입고 다녔다. 이를테면 브이넥 상의, 무릎 아래로는 내려오지 않는 원피스, A 라인 원피스, 머메이드 치마. 골반뼈에서 30센티미터가 넘는 치마는 들었다가 바로 놓았다. 예쁠 것이라 생각한 나이에 내 체형에 맞는 옷으로 가꾸면서 나를 좀 더 돋보이도록 했다. 또 살도 뺐었고. 어디를 가든 어깨를 펴고, 얼굴을 들고 다녔다.


특정 나이를 좋아했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러고 싶지는 않다. 돈도 있었고, 자신감도 높았으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여행도 다녔다. 옷이며 머리며 나와 맞는 스타일을 찾았는데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지금보다 조건이나 환경이 더 좋았던 시절이지만 그때로 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이 좋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자존감이 높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예쁘다고 한 그 나이에는 자존감은 없었다. 바닥까지 내려가지도 않았지만, 시간 지나면, 내 모습이 사라지면 날아갈 자존감이었다. 없어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내 삶에 불만도 딱히 없었다. 오히려 만족하면서 살았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달라졌다. 책을 읽으며 달라진 점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행복하기는 이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보지 못한 내용이었다. 이십 대에는 속상해서, 화나서 안 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상황에서도 한다. 해냈을 때 자기애, 자존감 높아진다.

둘째, 지금도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십 대에는 알 거 안다고 생각했지만 살아보니 아니다. 전문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세상 사는 법까지 아는 것도 아니었다. 동료들이 질문을 많이 한다고 해서 내가 많이 아는 게 아니었다. 특히 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하기 힘들었다.

지식, 경험 여전히 쌓아야 하고 지혜로 만들어야 한다. 평생 배움이라는 말을 대학교 다닐 때부터 들어왔으나 내가 여기에 해당할 줄은 몰랐다. 독서, 경험, 글쓰기를 통해 내 사고를 정립하고, 가치관 세우며 살고 있는 중이다. 삶을 삶의 태도를 만들어가는 지금이 좋다.

셋째, 나와 더 맞는 스타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옷은 여전히 위에서 언급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몸이 예전과 달라 못 입고 있다는 점만 빼면 다를 게 없다. 머리는 달라졌다. 긴 머리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24년도에 머리를 짧게 자른 적이 있다. 단발로 자르라는 남편의 말에 미동도 없었는데 쇼트커트는 마음이 움직였다. 긴 머리 싹둑 자르고 난 뒤에 다들 한마디씩 한다. 내 이미지와 어울린다고.

직업도 달라졌다. 숫자를 좋아해 회계팀에서 근무하던 나는 지금은 글을 쓰고 있다. 일 년에 고작 다섯 권 정도 읽던 내가 말이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구인 사이트를 한 번씩 보며 지원할 회사를 찾았다. 계산기를 두드리고, 자료를 만들어 의사결정 내릴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일이 좋았기 때문이다. 25년 5월이 되면 글 쓴 지 만 3년이 된다. 2년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지원할 곳을 찾지 않는다. 회계가 빠진 그 자리에 글쓰기가 자리 잡았다. 피곤해도, 놀러 가는 날에도, 밤에 술자리 약속이 있는 날에도 하고 자고, 하고 만난다. 이제는 억지로 하려고 하는 애를 쓰지 않아도 하는 날이 대부분이다.

맞아서다. 나와 어울리지 않았으면, 흥미 없었으면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내가 지금의 모습에 맞게 살아가니, 이를 또 알고 있으니 좋은 것이다.


다시 스무 살에 축구를 배우러 온 그녀 이야기로 돌아간다. 배우는 데도 빠르다. 어떻게 하는 모습만 보고 따라 할까 궁금하다. 미니 경기 때 옆에서 뛰어 보니, 속도도 빨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 축구를 배우러 온 23년 7월이 생각난다. 스텝도 제대로 못해서 집에 사다리 스텝 도구도 샀다. 일주일 연습해야 버벅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코치님의 시범이나 앞의 수강생이 하는 모습을 보고 제법 따라 한다. 자신감도 있다. 기본기 훈련 후에 콘을 세워서 이 사이를 통과하는데 앞서 배운 기본기를 하나씩 연습해 갔다. 보통 처음 오면, 뒤에 물러나서 보고 하던데 오늘은 아니다. 첫 번째로 서 있다. 이런 점에서 ’스무 살‘과 그 이상인 사람의 차이인 건가.

마흔을 넘긴 나. 이십 대와 비교하면 다르다. 세상에 물들기도 하고, 내 삶이 농익기도 하다. 나를 찾아가고 중심 잡고 살아가는 지금이 좋다. 스물일곱 살 일 때도 그랬다. 그때 당시에는 만족했다. 그래서 지금에 머물고 싶지는 않다. 오십 대가 되면 그 나이가 좋은 이유가 또 생겨날 것이다. 육십 대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나이 들어서 서글프다‘가 아니라, 더 멋진 모습으로 그 나이에 어울리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 믿는다.

축구를 배우면서 지금 내 나이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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