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같았던 첫 만남, 그리고 지금
"얘는 여자라서 오갈 데 없으니까 퇴사 못하는 거고"
이게 시작이었다. 징글징글한 어르신 한분이 해외출장 중 남들 앞에서 나에게 쏟아낸 망언. 영국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그저 무거웠던 가방과 보고서에 대한 압박과, 그리고 아직도 내 귀에서 생생히 들리는 저 말 뿐이었다.
그러나 정말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신기하기도 하지. 저 때 내 옆에서 나의 편을 들어주던 분이 나의 국장님이 되었고, 그가 오자마자 나에게 던진 질문은 '그때 넌 왜 그 팀을 따라서 출장을 온 거야?'였다.
사실, 그 출장이 우리 부서 출장도 아니었고, 어르신들 졸업관광같이 갔던 거였어서, 그저 통역할 사람과 보고서 쓸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고, 그렇게 대충 가져다 쓰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었음을 꿈에도 몰랐을 국장님께 사실을 말씀드리긴 그렇고,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해서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건 말이 되네.'라는 짧은 대답으로 우리의 한국에서의 첫 대화가 끝났다.
얼마 후, 우리 과장님이 날 조용히 불렀다.
"너 유학 갈 생각 있어?"
"있죠, 근데 영어권은 경쟁률이 세다 그래서, 독일어나 해볼까 하고 있어요"
"야, 내가 독일어 공부 해봤거든 시험 봤더니 4지선다 100점 만점에 25점 나오더라. 네가 언어에 재능이 있다 해도, 언제 그걸 또 하니. 가고 싶으면 그냥 지금 영어로 지원해. 국장님이 우리 부서 직원들 좀 가야지 왜 안 가냐고 하시는데, 다른 과장들이 다 네가 적임자라더라"
그렇게 나는 우리 회사 역사상, 첫 기술직 출신으로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국장님과 과장님이, '이 친구는 영어도 잘하고, 진짜 공부하러 가는 거고, 그래서 LSE 갈 거란다. 다녀오면 정말 널리 쓰일 인재다.' 하며 열심히 추천해 주신 덕이었다.
그래서 그 추천에 누가 되지 않고자, 정말 그 명성 자자한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와 UCL(University college of london)에 원서를 넣었고, 두 학교 모두 합격하여 2025년 9월부터 10년 만에 LSE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에겐 악몽 같았던 그 출장의 인연이, 그렇게 이어져 그저 꿈으로만 간직했던 해외유학이 현실이 되고, 그 모든 것이 그저 악인도 들어 쓰시고, 나의 작은 소망 하나 떨어뜨리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감사함으로, 희망차게 오른 유학길, 그러나 그 길에서 만난 영국은, 거만한 코쟁이들과, 한 대씩 쥐어박고 싶은 어린 룸메이트들과, 그래도 같은 아시아 계열이라고 그나마 곁을 내어주는 중국 속에서, 살인적인 물가와 씨름하며 살아가야 하는, 35년 내내 한국에서만 살아온 늙은이에게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