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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존과학자 C Nov 05. 2023

제목은 가장 마지막에 쓰여지므로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나는 몇 번은 와보았지만 결국엔 늘 낯선 출장지에서 이렇게 썼다.

"낯선 곳에서 낯선 시간을 경유하고 있는 나는 현재만을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순간 내가 투신하고 있던 생각은 과거였다. 피할 도리가 없는 과거. 내가 그때 읽고 있었던 책은 작가의 신앙적 고백이 담긴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나, 그것은 단지 내가 현재를 면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내 손에 쥐여있을 뿐이었음을 나는 안다. 이재는 확실해졌다. 왜냐하면, 내가 그곳으로부터 벗어나 안락한 반복의 공간에 들어선 지금 그 책은 재미라곤 하등 찾아볼 수 없는 책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출퇴근 길에서 맛있게 읽었다던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 더 이상 재미없어졌다는 출퇴근하지 않는 정지돈에게 그러하였듯. 그러니 책은 아주 자주 (그리고 대부분) 현실로부터 도피할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이렇게 쓴다. 쓰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읽기는 다만 도피하기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무언가를 읽었을 때는–이 쓰고 싶음의 증상은 단지 책, 좋은 글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책과 존재의 호응이다–나는 쓰지 않고 견딜 수 없으므로. 그리하여 나는 더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책을, 그곳에서는 꼭 붙들고 있었던 것이리라.

내가 기억하기론, 안락한 삶 속의 문을 열어젖힌 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었다. 그리고 그 책을 열어젖힌 건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이고 흐름은 거기서 멎는다. 나는 그 책을 분명 이전에 읽었고, 다른 부분도 아닌 그 부분을 열어젖히게 만든 순간이 있었음이 틀림없으나 더이상 내 회상의 능력이 가닿지 못할 뿐이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연인을 다 읽고 덮는 순간 과거의 수문은 유례 없이 열렸을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책의 내용조차 성공적으로 기억할 수 없다. 누가 그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내 전 생애를 비추는 거울을 펼쳤다고 얘기할 밖에.

그래, 내가 떠올린 건 지나간 시절이자 계절, 그리하여 지나간 사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미묘한 엄폐물 뒤에서, 내가 낯선 곳을 경유할 때를 기다리며 도사리듯 웅크리고 있다. 그러다가 내 삶의 일부, 거의 습관이 되어버린 (습관은 육체와 구분되지 않음을 나는 안다.) 나의 무언가가 작동하지 않는 공간에서 기습적으로 나를 관통한다. 그래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 낯설고 낯선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사랑에게 관통당했다. 된통.

그러나 내 사랑에 문제가 하나 있다면, 나는 오직 거울에 비친 것들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득 이전에 내가 만났던 사람이 내 폐부 깊숙이 찔러넣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그것은 내 몸을 관통할 만큼 길지도 않은 문장이었다. 넌 사랑을 할 줄 몰라.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그 말에 대항하고 싶었으나, 관뒀다. 왜냐하면 나는 분명 그 사람이 준 사랑을 받아내지 못했으므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댄들 그건 이미 합의를 벗어난 언어에 불과할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 누구보다 내 삶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항상 뒤늦은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러니 옛 연인의 말을 바꿔본다면 사랑을 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다만 뒤늦지 않을 줄 모르는 것뿐이다. 물론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나는, 지금 그 사람 또한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진의를 의심하지 말길.

뒤라스의 '연인'과 내 삶은 불가분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해내는 연인의 줄거리와 감상문엔 내 삶으로 얼룩져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나는 어쩌면 연인 속에 등장한 소녀를 일부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나는 그 소녀와 사랑을 나눴던, 소녀보다 열 살은 족히 많았던 그 중국 남성 또한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며, 뒤라스를 사랑하기도 하고, 그 글 자체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 나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인물도, 사물도, 거울이 아닌 것이 없다. 그 속엔 얼만큼의 나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과거를 들여다보기 위해 컴퓨터를 뒤적인다. 내가 이전에 썼던 글을 찾아본다. 대부분은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고, 외장하드를 열어보는 일의 귀찮음에 가로막혀 과거의 글들의 존재는 까맣게 잊혀져 있겠으나, 몇 개를 찾아내는 행운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통 나의 글 같지가 않다. 마치 거울을 통해 보는 나처럼... 나를 닮아 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인식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오해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보기 때문에 느껴지는 '내 것'이라는 느낌. 그 이상의 나를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발전이라는 주제가 두렵다. 나는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 불과 일 년 전의 글조차도 내 글처럼 느껴지지 않는 나에게는 나의 현재를 비출 과거가 없으니, 나는 아무리 잘해도 본전이고 아무리 고꾸라져도 제자리일 뿐이다.

그 글 중 하나에서 나는 내가 낯선 곳에서 낯선 시간을 지나치는 동안 나를 관통했던 그 기억의 주인공을 만난다. 처절했다거나, 사랑했다거나, 절실했다거나, 행복했다거나, 기뻤다는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뚜렷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도통 찾을 수 없다. 대신 내가 마주하는 건 내 모든 시야를 가릴 만큼 커다란 덩어리이다. 나는 오히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 커다란 게 나를 쫓아올 동안, 혹은 내 앞에 돌연히 나타날 동안 나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니. 아마도, 이것은 같이 살지 않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돌연함일 것이다. 나는 그동안 그것과 함께 살아왔으나 단지 여태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느낀다. 사랑을. 불타오르는 사랑을. 애가 끓어오를 만큼 처절한 사랑을. 그 거대하고 묵직한 것이 나를 짓이기고 지나가기를 바란다. 오히려 그것에 짓눌려 죽으면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파괴적인 생각마저 들 정도로.

이쯤에서 나는 사랑을 멈춘다. 내가 느끼는 사랑을 멈추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미 죽은 것을 사랑하는 미친 짓을 관두라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이미 기이하고 뒤틀려있는 이 사랑의 방식은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된다. 대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던 무언가를 멈출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에너지의 전환처럼, 자동차의 브레이크 패드가 바퀴의 속도를 빼앗는 대신 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듯, 나는 사랑을 다른 식으로 소화해야만 한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춘다. 나는 읽던 책을 덮는다. 나는 보던 영화를 끈다. 나는 모든 동작을 멈춘 채, 팔을 고이 모아 배 위에 얹는다. 배는 나의 것이 아닌 것만 같고, 사람 가죽으로 만든 북처럼 느껴진다. 그 이질적인 감각을 손바닥과 배로 느끼는데, 둘은 도저히 합쳐지지 않고 서로 따로 논다. 마치 어긋난 차원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비참함을 뼈저리게 삼킨다. 공기의 성분이 의심될 만큼, 내가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 자체에 비참함이라는 원소가 내재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만큼. 이건 나의 비참함을 탓하기 위한 생각일까? 모르겠다. 숨만 쉰다. 오르내리는 북의 가죽이 손바닥에서 느껴지고, 나의 호흡을 방해하는 팔의 무게가 느껴진다. 나는 누군가를 안는다. 온기만 있으면 된다. 그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사랑을 할 줄 몰라.

나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방법을 잘 안다. 나는 지금도 사랑하고 있으므로. 나는 손에 잡히는 책을 하나 펼친다. 그 책의 요구조건은 다음과 같다. 책 제목이 마음에 들 것, 커다란 거울일 것. 나는 이미 쓰여진 책 위에 새로운 얼룩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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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심산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글은 없다. 글을 쓰는 매 순간 나는 갱신되고, 지금의 나는 조금 전의 글을 읽는 타인이 된다. 이로써 나는 나로부터 타인이 되었고, 글을 쓴다는 것은 한편으론 소진하는 일이기에 나는 나의 일부를 잃어버렸다. 나의 일부는 내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덩어리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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