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그대 7.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빨리 빠져나오고 싶다는 마음을 수차례 다독이며 주어졌던 제 역할을 다했습니다. 멀리 떠난 정신을 기어코 붙잡아 지하철을 타고 온전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들 잠든 늦은 밤, 거실은 불을 켠 채 홀로 잠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TV에서 윌 스미스가 분투 중이더군요. 최고의 스나이퍼이자 유능한 전사였던 그는 자신과 똑같은 복제 인간을 맞아 맹렬히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복제 인간을 만든 회사의 이사를 찾아갔습니다. 이제 한 판 제대로 붙을 모양이었어요.
그의 그림은 고통을 날 것으로 보여줍니다. 분노를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그의 캔버스에서 외치는 200db(데시벨)의 아우성은 듣는 이의 고막을 터트립니다. '평화, 사랑, 부드러움, 정직, 양보, 이해, 정의, 온정' 같은 단어를 '위선'이라는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립니다. 그는 우리의 건너편에 있습니다. 대다수 인간의 대변자인 헨리(윌 스미스 분)의 적중률 높은 탄환이 수도 없이 그를 쏘아 쓰러뜨렸지만, 그는 더 기괴하게 일그러질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의 제단 앞에 엎드린 벨리알이자 파리대왕이고 곧 우리의 뒷모습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가 열 번쯤 손에 들었다 열한 번쯤 내려놓은 화가가 바로 그,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입니다. 도무지 전체를 마주 대할 수 없습니다. 늘 한 점씩 찔끔찔끔 간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맞닥뜨리지 않았다면 결코 다루지 않았을 숙제입니다. 겁 많은 저는 오늘도, 영화 속 깜짝 등장한 저 작품만 곁눈질하겠습니다. 그의 작품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1944>입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성소의 제단화에 쓰였던 '세폭화'라는 형식을 빌렸습니다. '십자가 책형'이라는 종교적 숭고와 헌신의 아이콘도 빌렸습니다. 등장하는 사지 없는 생물은 고대 그리스의 폭력적인 범죄자를 살해하는 퓨리(Furies)에게서 왔다고 했습니다. 베이컨은 기독교의 형식(대상)과 고대 신화를 빌려 인간의 폭력적인 내면과 잔혹함, 불안을 이미지화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이 작품은 1945년 4월, 런던 르페브르(Lefevre) 갤러리에 헨리 무어(Henry Moore)와 그레이엄 서덜랜드(Graham Sutherland)의 작품과 함께 처음 전시되었습니다. 무명의 베이컨을 배려한 친구 서덜랜드의 추천 때문이라고 하지요. 베이컨에게 서덜랜드는 '귀인'이었던 셈입니다. 이 작품이 공개된 1945년은 6년 간의 길고 광폭한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였습니다. 나치 강제 수용소의 사진과 영상은 잔인했던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핵무기는 인류 모두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절묘한 시점과 맞물려 대중에게 선보이게 된 이 작품은 무명의 그를 단번에 화단의 늦깎이 기린아(麒麟兒)로 데뷔시켰습니다.
비평가 알랭 조프로이(Alain Jouffroy, 1928~2015)는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평했습니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미래를 묘사한 이 작품은 의심할 나위 없이 비엔날레를 통틀어 단 하나의 진정한 발견이다."
내 안에 저런 어두움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는 저는... 침.묵.합.니.다.
'내가 나를 노린다’
밤은 깊고 홀로 술 한 잔을 따릅니다. 쪼로록 술이 담깁니다. 향기롭습니다. 책 소개가 술을 따르듯 향기로웠나 되짚어봅니다. 두 잔엔 세상이 담깁니다. '명함'에 대한 관심은 처음 가는 도로의 표지판을 읽고자 하는 것과 같은 마음일 터입니다. 낯선 길이니까요. 또 각자의 현실, 각각의 상황이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 자신에 대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 잔엔 마음이 담깁니다.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든 나를 파괴하는 것이든 내 안에 있는 것이겠지요. 내가 성숙하고 있다면 내 안에서 깨달아 더 깊어지는 것일 테고, 내가 무너지고 있다면 내 안의 결함으로 스스로 붕괴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왜 항상 삶의 중심이 내 안을 향해야 하는지 깨닫습니다. 네 잔 째쯤 술잔에 별이 퐁당 빠졌습니다. 전 반짝이는 별을 호호 불며 마셨습니다.
별을 마시며 오늘 하루를 잘 감당한 절 토닥입니다.
“잘했어. 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