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그대 8. 파블로 피카소 <돈 키호테>
현실과 상상 중 어느 것이 더 힘 셀까요? 아마 '상상'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상상은 경계가 없기에 무궁하고 무한할 테니까요. 그럼 현실적 인간과 몽상가가 있다면 어느 쪽이 더 힘 셀까요? 대부분 '현실적 인간'의 손을 들어주기 십상일 터입니다. 몽상가란 멀리 있을 때 '자유'나 '창조'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것이지 가까이 두기엔 너무나 위태롭고 불안한 존재입니다. '몽상가'란 반듯한 내 삶을 위협하는 '비상식적 타자'니까요. '상상'이 '현실'보다 더 힘이 센데도 불구하고 사회인으로 현실적 정무 감각을 갖추고, 효율적 경제 능력이 있고, 규범이 내면화된 합리적 인간은 몽상가보다 결혼하기에도 사랑하기에도 적합한 인물입니다. 더 강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린 굳이 하나님이 보낸 천사를 찾지 않습니다. 합리적 인간이 지상에 '행복한 천국'을 건설할 터이니까요.
그런데 인간이 건설한 행복한 천국은 '완전'한가요? '영원'한가요? 아니 인간은 '행복'만을 추구할까요? 모르겠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대로 '진, 선, 미'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일까요? 역시 모르겠습니다. 다만 욕망하는 것, 상상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강렬하다는 사실입니다. 고루하고 모범적이었던 돈 호세를 흔든 건 뇌쇄적인 집시여인 카르멘이 아니라 그녀가 부른 하바네라( Habanera)가 아니었을까요? 그녀는 "사랑은 자유로운 새 (L'amour est un oiseau rebelle)"라면서 붉은 장미를 떨어뜨립니다. 호세는 날갯짓하는 자유로운 새인 '사랑'을 자신 안에 품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지요.
16세기 위대한 두 명의 작가,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는 영국과 스페인에서 각각 자신을 닮은 아들을 낳습니다. 둘은 마치 이란성쌍둥이 같았지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였던 햄릿과 '야망과 위선, 선물 받은 삶으로부터 도망쳐 가장 좁고 어려운 길로 나만의 영광'을 찾던 돈 키호테(Don Quixote)였습니다. 돈(Don)은 '~경', '나리'라는 경칭이고, 키호테(Quixote)는 허벅지 또는 갑옷의 허벅지 보호장비의 이름이니 '정력적인 나리'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벌써 상상력 폭발입니다. 이제 삶에 숭고했고 선과 악에 번민했던 햄릿이 아닌 힘센 꿈과 상상을 향해 달렸던 인간, 피카소의 돈 키호테에게 다시 질문을 던져 보야야겠습니다.
붓으로 한걸음에 달린 드로잉입니다. 쭉쭉 그은 선에 막힘이 없습니다. 대상의 특징을 통찰력 있게 파악하고 현대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능숙하고 노련하지만 가볍지 않습니다. 1605년 발표한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출간 35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주간지가 파블로 피카소에게 의뢰한 <돈 키호테, 1955>입니다.
태양이 작렬합니다. 늙은 말 로시난테의 등 위에 돈 키호테는 늠름합니다. 등을 곧추세우고 창과 방패를 들었습니다. 머리엔 맘브리노의 헬멧을 썼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발사로부터 훔친 대야에 불과하지요. 매부리코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코와 한 줄 수염, 가느다란 목선과 가로로 짧게 끊은 어깨는 돈 키호테의 성격을 단박에 느끼게 합니다. 피카소는 로시난테의 발아래로, 풍차가 돌아가는 가상의 언덕을 원근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중언부언 없는 담대한 흑백의 조화는 하늘과 능선을 시원하게 펼쳐 놓습니다.
돈 키호테의 맞은편, 그의 조수 산초 판자(Sancho Panza '축복받는 자'와 '돼지'라는 이중 뜻)가 당나귀 대플을 타고 있습니다. 호리호리하고 길쭉한 돈 키호테와 몸집 있고 둥글둥글한 산초의 기막힌 대비입니다. 산초는 돈 키호테를 충직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돈 키호테는 마주 보고 있는 산초에게 모험의 결과가 아니라 모험을 한다는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돈 키호테를 태운 로시난테는 뒷다리를 살짝 구부렸습니다. 곧 달리겠다는 암시겠지요. 명마는 주인의 뜻을 거절하지 않는 법입니다. 풍차를 거인으로 아는 돈 키호테의 말에 로시난테는 한 치의 의심 없이 튀어나갈 것입니다. 피카소는 달리는 모습을 그리지 않고 달리려는 자세만으로 운동성을 극대화했습니다. 역시 천재적인 화가입니다. 빛의 강세나 색의 계조 없는 흑백의 드로잉, 그저 선 하나가 화면에 넘치는 율동감을 선사합니다.
피카소는 그가 발전시킨 큐비즘과는 다른 붓으로 조국 스페인의 위대했던 몽상가를 뭉클하게 그려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를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도달하지 못할 곳을 향해 달리고
닿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는 마드리드의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하급 장인 취급을 받았던 외과 의사였고 덕분에 매우 가난했습니다.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22세에 추기경 아쿠아비바의 시종으로 들어가 로마에서 인문적인 지적 세계를 경험합니다. 24세에 레판토 해전에 참전해 왼쪽 팔에 장애를 입었고, 28세엔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알제리에서 5년간 노예 생활을 합니다. 생존에 전전긍긍해야 했던 그는 45세에 나라의 허락 없는 밀 매각을 해 세비야 감옥에 투옥됩니다. 그의 삶 대부분은 부정적으로 드라마틱했고 몹시 불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비야 감옥에서 '돈 키호테'를 구상했다고 합니다. 용기와 자유를 갖고 꿈을 실행할 때마다 처참하게 패배하는 <돈 키호테>를 그의 나이 57세에 출간합니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를 통해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산초는 돈 키호테를 모험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며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편력기사(Knight-errant)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인님, 위험한 줄 알면서 굳이 나아가는 것은 그다지 분별 있는 아닙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고 한 번에 모든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방법입지요."
하지만 돈키호테는 "산초야, 진정한 용기에는 마법도 맥을 못 추는 법이니라. 마법사들이 아무리 나를 못살게 굴어도 내 용기와 끈기 앞에서는 무릎을 꿇게 마련이지."라고 합니다. 햄릿이 사유하고 고뇌하는 인간이었다면 돈 키호테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그 꿈을 능동적으로 실행하는 인간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안정적인 궤도를 순환하는 열차이기를 바랍니다. 창 밖 거친 불운으로부터의 알맞은 거리감, 부당한 대접과 적절치 않은 분배에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 여유로움, 기존의 가치가 존중되고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평온함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튼튼히 쌓습니다. 하지만 때로 과거로부터 가져온 현재가 부서지며 요동치는 순간, 삶이 전복되는 순간이 옵니다. 오직 상상의 힘만이 자신의 풀린 허벅지를 보호할 수 있는 그때, 돈 키호테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장차 이룰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세르반테스는 "미쳐서 살다 정신 들어 죽다"라는 돈 키호테의 묘비명과 함께 실패하지만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간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1616년 4월 22일 그가 죽고 하루 뒤, 셰익스피어도 햄릿을 두고 먼 길을 떠납니다. 꿈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겠지요. 실패는 늘 아프고 처참합니다. 그렇더라도 '불가능한 꿈'을 꿀 수 있는 인간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