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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un 18. 2024

그는 나의 뒤를 추적한다

상상농담 46.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너무나 여러 번 들춰서 처음의 그 예민하고 단정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는 김훈 작가님의 <칼의 노래>입니다. 표지 안쪽은 태풍 맞은 창문이 되었지요. 제 책장에서 이렇게 덜컹, 와장창이 된 최초의 책은 신영복 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습니다. 마음이 정처 없을 때마다, 균형을 잃을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열어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낱장이 된 페이지마다 멈추고 서성거렸던 제 발자국이 보입니다.


김훈 <칼의 노래>


  영화나 책 후기를 보면 명장면, 명대사, 명문장이 나옵니다. 이 책에는 '헤아릴 수 없는 적'의 숫자보다 '헤아릴 수 없는 명문장'이 나오지요. 그 총총한 문장에는 한 번도 끼인 적 없이, 번쩍이는 왜군의 아타케부네 사이에 조촐한 조선의 사후선(伺候船) 같은 이 문장은 풍랑과 고요를 번갈아 맞는 삶의 바다에서 수시로 제게 노를 저어 왔습니다.


 뇌물 보리쌀 두 가마를 받은 아전에게 곤장 40대를 치는 장면입니다.

 "늙고 병든 아전이었다. 그 아전은 아마 스무 대쯤에서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진 것을 모른 행리가 나머지 스무 대를 계속 쳤다. 그의 몸은 으스러져서 죽처럼 흘러내렸다. 그날 밤 나는 동헌 객사에 묵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아전의 몸을 으깨던 매와 보리쌀로 죽을 끓여 먹었을 그의 식솔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혼자 앉아 있었다."가 배경입니다.


  "나는 맑은 청정수를 들이켜고 싶었다."   


  일상이 중첩되는 시간 중, 어제 같은 날엔 전 아주 크게 심호흡을 합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불어오는 맑고 청량한 공기를 들이켜고 싶어서. 어제 그곳은 사회생활의 숙련도와 인내심이 극도로 필요한 재난 지역이었습니다. 저 깊은 곳에서 '질식할 것 같아.' 하는 소리가 들렸지요.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는 마음을 수차례 다독이며 제 역할을 다하고 긴 지하철에 안겨 온전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무쇠님은 안방에서 자고 누가님은 건넌방에서 자고 거실은 불을 켠 채 홀로 잠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TV에서 윌 스미스(헨리 역)가 분투 중이더군요. 최고의 스나이퍼이자 유능한 전사였던 그는 자신과 똑같은 복제 인간을 맞아 맹렬히 싸우더니 그 복제 인간을 만든 코드명 "GEMINI"라는 회사의 이사인 '클레이 베리스(클라이브 오웬 분)'를 찾아갔습니다. 이제 한 판 제대로 붙을 모양이었어요.


영화 <제미니 맨> 중에서


  그런데 보이세요? 저 뒷 편의 그림!

  혹시 저 그림의 제목을 아시는 분이 있을까요? 만일 지금처럼 실시간 검색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다면 퀴즈를 내어 볼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정답을 맞히신 분이 있다면 저의 찬찬하고 세밀한 2.0의 시력으로 정답자를 오래도록 응시할 것입니다. 코를 킁킁대어 냄새를 식별하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볼 것입니다. 그가 나와 같이 '고통'을 감지하는 시각과 후각과 미각을 갖고 있는지, 동류(同類)인지를 확인해 볼 기회니까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고통을 날 것으로 보여줍니다. 분노를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그의 캔버스에서 외치는 200db(데시벨)의 아우성은 듣는 이의 마음속 고막을 터트립니다. '평화, 사랑, 부드러움, 정직, 양보, 이해, 정의, 온정'같은 단어를 '위선'이라는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립니다. 그는 우리의 건너편에 있습니다. 대다수 인간들의 대변자인 헨리(윌 스미스 분)의 적중률 높은 탄환이 수도 없이 그를 쏘아 쓰러뜨렸지만 그는 더 기괴하게 일그러질 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의 제단 앞에 엎드린 벨리알이자 파리대왕이고 곧 우리의 뒷모습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가 열 번쯤 손에 들었다 열한 번쯤 내려놓은 화가가 프랜시스 베이컨과 프리다 칼로입니다. 이 둘은 도무지 전체를 마주 대할 수 없습니다. 늘 한 점씩 찔끔찔끔 간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맞닥뜨리지 않았다면 결코 다루지 않았을 숙제입니다. 겁 많은 저는 오늘도, 영화 속 깜짝 등장한 저 작품만 곁눈질해 보겠습니다. 그의 작품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Three Studies for Figures at the Base of a Crucifixion, 1944>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 1944>


  보는 순간 몸이 움츠러듭니다. 창문이나 문은 보이지 않습니다. 외부와는 단절된 폐쇄된 공간입니다. 바탕을 꽉 채운 얼룩덜룩한 주황색은 불길하기 짝이 없고 인간 같기도 동물 같기도 한 형상이 고통 속에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목은 장어처럼 길고 커다란 입을 벌려 물거나 삼킬 듯 으르렁댑니다. 혐오스러운 입에는 혀는 없고 단단한 이만 보입니다. 말이나 언어처럼 두 가지 형태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못하겠지요. 적어도 두 작품엔 눈도 보이지 않습니다. 절대 고독 속에 홀로 남겨진 무기력입니다. 인간을 쥐어짜 다 흘려보낸 뒤 남은 찌꺼기가 저런 공포와 두려움, 외로움일까요?


  평론가 존 클레어(John Clair)가 그에게 "도살, 도살, 절단된 고기와 살점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베이컨은 "그게 십자가형의 전부이지 않습니까? 그보다 더 야만적인 일과 누군가를 죽이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성소의 제단화에 쓰였던 '세폭화'라는 형식을 빌렸습니다. '십자가 책형'이라는 종교적 숭고와 헌신의 아이콘도 빌렸습니다. 등장하는 사지 없는 생물은 고대 그리스의 폭력적인 범죄자를 살해하는 퓨리(Furies)에게서 왔다고 했습니다. 베이컨은 기독교의 형식(대상)과 고대 신화를 빌려 인간의 폭력적인 내면과 잔혹함, 불안을 이미지화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이 작품은 1945년 4월, 런던 르페브르(Lefevre) 갤러리에 헨리 무어(Henry Moore)와 그레이엄 서덜랜드(Graham Sutherland)의 작품과 함께 처음 전시되었습니다. 무명의 베이컨을 배려한 친구 서덜랜드의 추천 때문이라고 하지요. 베이컨에게 서덜랜드는 '귀인'이었던 셈입니다. 이 작품이 공개된 1945년은 6년 간의 길고 광폭한 전쟁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였습니다. 나치 강제 수용소의 사진과 영상은 잔인했던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핵무기는 인류 모두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절묘한 시점과 맞물려 대중에게 선보이게 된 이 작품은 무명의 그를 단번에 화단의 늦깎이 기린아(麒麟兒)로 만들었습니다.


이전의 삼폭화 예) 로베르 캉팽 <메로드 삼폭 제단화, 1427~1432>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은 영국 화가입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지요.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던 16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복 형인 니컬러스 베이컨이 먼 선조(先祖)입니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습니다. 그가 손대는 건 대부분 가질 수 있었지요. 안타까운 건 그는 전통을 중요시하는 영국인의, 더욱이 보수성이 강한 아일랜드인의 선택지에는 없는 것을 욕망했습니다. 그는 동성애자였습니다. 하인들은 그를 거절하지 못했고 이를 알게 된 강직한 아버지의 분노를 샀습니다. 그는 여러 번 아버지의 채찍질을 견뎌야 했고 어머니의 속옷을 입고 있다 들킨 열여섯 살에 삼촌이 있는 베를린으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양 무리로 쫓은 격이었지요. 그는 마음껏 쾌락을 탐했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베를린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영국으로 떠돌았습니다. 잠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기도 했지만 그는 좀 더 높은 명성을 원했습니다. 1,2차 세계대전의 대공포에 부서지고 핵폭탄에 녹아내렸던 세상에서 그는 그 찢어지고 박살 난 현재를 그리기로 마음먹습니다. 그건 그의 내면이 아직도 아버지의 채찍을 맞고 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 세상에서도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꼈기 때문일까요? 지독한 외로움에 기반한 그의 혼란과 양면성은 그를 20세기 회화의 한 축을 견인하는 추동력이 되게 했습니다. 아이러니지요.


  이안 감독은 그의 <십자가 책형을 위한 세 개의 습작>을 사악한 클레이 베리스 뒤 벽면에 배치했습니다. 오늘, 이 늦은 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저 모습이 분명 우리 안에 존재할 텐데...


제미니 맨 포스터

  

  영화 '제미니 맨'의 포스터엔 이렇게 매력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나를 노린다'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든 나를 파괴하는 것이든 내 안에 있는 것이겠지요. <칼의 노래>에 이 귀절도 나옵니다.

  "내가 적을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있을 것이었다."


  내가 성숙하고 있다면 내 안에서 깨달아 더 깊어지는 것일 테고, 내가 무너지고 있다면 내 안의 결함으로 스스로 붕괴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삶의 중심이 항상 내 안을 향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쯤에서 어제의 하루를 잘 감당한 절 토닥입니다.

  "잘했어. 노라."



PS : 다소 무거운 그림 대신 밝고 청량한(^^) 음악 첨부합니다. 조성진, 김선욱님의 앵코르 곡 '헝가리무곡 5번'입니다. 아, 그리구 제 책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가 브런치 책방에 등록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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