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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Aug 13. 2024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마흔, 그대 6. 그리스의 <레슬러>

  엎드린 레슬러의 이마와 손바닥에서 "끄응" 신음이 흘러나옵니다. 그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필사적입니다. 거친 호흡이 갈비뼈의 깊은 주름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미 그의 오른팔은 뒤로 꺾여 공격하는 레슬러의 손에 잡혀 있습니다. 기울어진 어깨는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오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암시합니다. 대리석에서 땀이 뚝뚝 떨어집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격하는 레슬러는 그의 왼다리로 상대의 왼쪽 허벅지를 걸고 조입니다. 자신의 발목으로 상대의 발목을 찍어 누릅니다.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그의 대퇴근과 대둔근은 총알도 튕겨 나올 듯 단단합니다. 이제 꺾은 팔 아래로 자신의 머리를 집어넣고 상대를 들고 돌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남은 팔로 상대의 목을 조르겠지요. 몸과 몸이 거칠고 솔직하게 부딪치는 순간입니다. 민첩하고 순결한 에너지가 넘칩니다. 벌거벗었지만 남루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근육과 피부는 보정 없이 아름답습니다. 숨이 턱 막힙니다.


  

그리스 조각가 불명확 <레슬러, BC 3c 분실된 그리스 원본을 본떠 만든 로마 대리석 조각품>


  1583년 로마의 포르타 산 조반니 근처에서 발견된 이 <레슬러>라는 작품은 유물의 진가를 알아본 메디치 가에서 사들여 현재는 우피치 트리뷰나(우피치 미술관 팔각형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동안 그리스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미론, 케피소도투스, 헬리오도루스 등등의 조각가 작품이라고 옴니암니 따졌으나, 현재는 리시포스 학파가 BC 3세기 경에 분실한 헬레니즘 청동 조각품을 로마가 최고의 품질로 복제한 로마 복제품으로 여깁니다. 발견 후 녹청을 제거해 매운 눈씨와 옹골찬 근육이 한결 생생해졌습니다.


  요한 조파니가 꼼꼼하게 그린 <우피치 미술관의 트리뷰나, 1772~1777>에도 이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요한 조파니 <우피치 미술관의 트리뷰나, 1772~1777>


  이 조각은 오래도록 살아남았습니다. 둘의 경기를 관람하는 이들의 응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1,700여 년에 이르도록 수비하는 레슬러의 어깨는 기어코 땅에 닿지 않았으며, 공격하는 레슬러의 한 팔은 끝내 그의 목을 누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밤낮 없는 경기로 둘의 땀과 눈물은 서로에게 스미고 있습니다.


  정작 두 레슬러가 흘린 땀과 눈물의 성분은 같을 것입니다. 인간의 땀은 99%의 물에 1% 안팎의 소금과 암모니아, 마그네슘, 칼륨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눈물은 90%의 물과 약 7%의 소금, 2%의 단백질, 그 외 점액소로 채워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성분은 같으나 맛과 온도는 다른가 봅니다. 시시 때때로 인간사에 간섭하는 과학이 이르기를 분노할 때는 짜고 맛의 눈물이 나고, 슬플 때 흘리는 눈물은 신맛이며, 기쁠 때 나오는 눈물은 단맛이라고 했습니다. 몸의 언어는 참으로 정직합니다.


  또 감탄을 너머 감동할 때, 삶의 낙차를 경험할 때, 현실을 엿보지 않고 정면으로 맞닥뜨릴 때, 흐르는 눈물을 우린 '뜨겁다'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뜨거운 눈물'은 핏줄에 수혈한 마그마입니다. 마그마는 아주 미세한 틈도 지나치지 않고 온몸과 영혼을 활화산처럼 채우지요.


  그런 의미에서 전 승패에 초연한 응원자의 '평정심'을 믿지 않습니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지, 뭐"라고 짐짓 초연한 태도의 '의연함'은 결국 '관찰자의 시각'이자 다른 버전의 '비평가의 말'일 뿐입니다. 애정과 공감을 기반으로 하는 연대는 곧 그의 입장이 되는 것이며, 삶의 현장에 함께 서는 것이고, 뜨거운 눈물로 온몸과 영혼을 적시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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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이 끝났습니다. 운동경기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으니 달디 단 눈물을 흘린 선수도, 쓰고 짜고 신 눈물을 맛본 선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땀과 눈물의 성분이 같듯 그들의 노력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더 열심히 했다', '더 재능이 뛰어나다'의 '더'에 대해 전 계량하지 못합니다. 한 스푼인지, 한 컵인지, 한 바가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더'는 선수 각자마다 판단할 일입니다. 한 스푼을 더 해야 한다면, 한 컵을 부어야 한다면, 한 바가지만큼 부족했다면 그들은 다시금 운동화 끈을 맬 것입니다.


  다만 전 두 레슬러에게서, 경기를 마친 선수들에게서, 인간의 위대함을 봅니다. 자신의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려는 노력, 고통을 참는 인내, 상대의 수를 읽는 지혜, 완급을 조절하는 절제, 서로를 배려하는 팀워크, 무언가를 대표한다는 책임을 봅니다. 패자임에도 남을 응원하는 아량, 보상 없는 노력에도 주위를 다독이는 드레진 성숙을 봅니다.


  오랜만에 머리를 자르고 보호대를 착용하고 부드럽게 다리를 풀어봅니다.  '능력'이라는 강한 레슬러에게 팔이 꺾이고 목이 눌려 한참을 꺾꺾 댔습니다. 한 계절을 매달렸던 단편소설의 평가는 냉정했고 그만큼 참혹했습니다. 아직도 쓰고 짜고 신 눈물이 얼굴의 주름을 따라 흘러내립니다. 하지만 남이 보지 않을 때마다 제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이에도 선수들의 경기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시 함께 링에 오릅시다. 


  여전히 트리뷰나에서 맹렬히 경기 중인 레슬러에게, 경기를 마친 선수들에게, 벌거벗고 삶의 길 위에 우리 모두에게,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였던 요기 베라(Lawrence Peter "Yogi" Berra, 1925~2015)남긴 말을 전합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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