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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Jan 08. 2024

시간의 얼굴

상상농담 37. 로마시대 부조 <카이로스>

  인디언의 한 부족은 1월은 '해가 눈을 녹일 힘이 없는 달'이라고 하고, 2월은 '홀로 걷는 달'이라고 합니다. 해가 주춤거릴 만큼 굳세고 조용한 겨울을 고독히 홀로 걸어야 독수리의 달인 3월이 온다는 것이겠지요. 인디언들이 마주한 변화하는 시간의 얼굴입니다.



  우리에게도 봉화처럼 연이어 달린 시간이 2024년 산봉우리에 도착했습니다. 봉수대에서 봉화 1 거를 올립니다. '안녕' 또는 '무사(無事)'입니다. 올해는 작고 부실한 날개를 수선해 봉화를 올린 이 높은 산봉우리를 박차고 저 넓은 창공을 향해 날 수 있을까요. 1년이라는 시간을 자르고 연마(鍊磨)해 찬란히 빛나게 할 수 있을까요? 2025년에게 다시 '안녕하다'는 1거의 봉화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우리 앞에 도착한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 봐야겠습니다.



배경 : <카이로스, 160~180> *뤼시포스 원본 이후의 로마작품 / 오른쪽하단 : <카이로스> 후대 제작품



  인류 문화의 여명기를 담당했던 그리스인들은 '철학적 인간들'이었습니다. 삶의 구성요소에 '개념'과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들의 명철한 눈에 시간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60초는 1분, 60분은 1시간, 24시간은 하루, 365일은 1년 하는 것처럼 시침이 똑딱똑딱 흐르는 객관적인 뉴턴의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했습니다. 삶을 직각으로 깎아내는 어떤 '결정적 순간', '의미가 부여된 시간', '어느 적절한 때'는 '카이로스'라고 했습니다. 카이로스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시간입니다.



  그리스 문화 최전성기였던 BC 5세기에 카이로스는 제우스의 막둥이로 처음 등장합니다. 칼 야스퍼스는 BC 5세기를 모든 인류 정신의 기원, 공통의 기축이 되는 시대라는 의미로 '축의 시대'라고 명명했습니다. 인간의 창조성이 폭발하던 시기,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에 철학하는 그리스인들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흐르는 시간-크로노스'와 '의미 있는 한 순간-카이로스'를 나누었습니다.


 

  드디어 BC 4세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싶어 했고 신(神)도 인간의 육체를 가졌다고 믿었던 그리스인들이 이 카이로스를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었습니다. BC 350~330년 사이,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전속 사진사였던 뤼시포스(Lysippos)가 조각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아끼던 아티스트였고 자신의 주군에게 '순간, timing'의 중요성을 알려주려 했습니다. BC 3세기의 시인 포시디포스(Posideppos)는 대화형식의 시를 통해 부조의 젊은 청년 카이로스에 대해 힘 있는 목소리로 전해줍니다.



  그대는 누구고 누구의 아들인가 / 난 카이로스, 모든 것을 정복하는 시간, 뤼시포스가 만들었지 / 그대는 왜 까치발을 하고 있고 발목에 있는 날개는 무엇인고 / 난 신속하고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니까 / 손에 든 칼은 무엇인고 / 내가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롭다는 뜻이지 / 앞머리가 길구나 / 누가 날 만났을 때 잡아채게 하려고 / 뒤통수는 대머리인데 / 나를 한번 지나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뤼시포스가 날 만들어 대문 앞에 세운 거라네.



  로마시대 부조는 발을 디디고 있지만 이후 제작된 대리석에는 둥그런 구 위에 중심을 잡고 있는 모습이 발견됩니다. 그만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순간이라는 말이겠지요. 영어 Occasion(상황, 경우)의 어원은 라틴어 '오카시오 Occasio'입니다. 로마신화 속 기회의 여신 이름이 오카시오입니다. 여신은 굴러가는 바퀴 위에 서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 카이로스가 '기회(opportunity)'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는 것에 대한 맥락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 흐르는 시간 크로노스는 주로 나이 든 모습이지만 카이로스는 순간을 나타내서인지 항상 젊은 청년으로 등장합니다. '젊음' 자체가 '기회'입니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카이로스>



  그리스 로마 문화가 저물고 중세에 다다르자 시간은 늙거나 젊지 않고 멈추었습니다. 신이 부지런히 닦고 조이고 기름 쳤던 천국과 지옥만이 서로를 향해 시계추를 흔들었습니다. 지금, 여기는 불완전한 그림자에 불과했고 완전하고 분명하고 고정된 것은 저 너머, 신에게 있었습니다. 크로노스라는 위엄 있는 어른이 법과 이성과 규범과 체계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순리적 인과관계가 기본이 되는 크로노스의 단단하고 논리적인 토대 때문이었을까요. 사회는 계몽주의로, 예술은 고전주의로, 과학은 뉴턴의 물리학으로 거듭 발전했습니다. 문명은 크로노스의 어깨에 올라타고 성큼성큼 내일로 향했습니다.



  대신 현실에 불완전한 균형을 잡고 있던 젊은 카이로스는 위태로워졌습니다. 인류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릴 줄 알았던 명랑한 그리스인으로부터 상상할 줄 모르고 그릴 줄 모르는 지루한 근대인이 되어갔습니다. 카이로스가 풍성한 앞머리를 날리며 일상에서 빠르고 아주 급속히 달아나자, 인간은 정확하지만 고루하고 꾸미지만 맵시 없고 발전했지만 낡아졌습니다. 존재의 성숙과 행복을 향한 까다롭고 복잡한 합금의 비율에 '알맞은 순간'과 '의미 있는 찰나'가 있다는 걸 잊었습니다. 오래전 인디언들은 변화하는 시간의 얼굴을 보고 전설과 신비를 남겼습니다. 고정된 시간의 초상화만을 벽에 걸어두고 있는 우리가 다시 '상상'과 '기적'을 향해 날아갈 수 있을까요?



  봉화는 상태를 알리는 신호입니다. 평상시에는 1 거, 적이 해상이나 국경에 나타나면 2 거, 해안이나 변경에 접근하면 3 거, 적이 국경을 침범하거나 전투가 벌어지면 4 거, 적이 상륙하거나 국내에 교전이 벌어지면 5 거를 올립니다. 명랑하지 않은 하루가 반복되고, 지루한 근대인의 날들이 이어진다면, 2024년 봉화대에 올라 봉화 2 거를 올립니다. 마음에 우울이 찾아오고, 이웃이 미워지고, 호기심을 잃어버렸다면 봉화 3 거를 올립니다. 내 인생이 난폭한 드라마의 엑스트라를 맡았다고 생각되고, 내 안과 밖의 거리가 멀어져 그 안에 차오르는 습기로 발목에 눈물이 가득하다면 봉화 4 거를 올립니다. 견고한 크로노스도, 젊고 수줍고 예민한 카이로스도 방문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시간의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면 봉화 5 거를 올립니다. 내 안부를 걱정하는 벗이 찾아오는 상상과 기적의 크로노스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적이 2025년에게 다시 봉화 1 거를 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PS :  스콧 피츠제랄드 원작이었던 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입니다. 그중 거꾸로 가는 시계를 만든 시계공 이야기가 오래 남죠. 영상 올립니다. 스콧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이런 말도 나오지요.


  "그래서 우리는 조류를 거슬러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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