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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May 28. 2024

신의 오른손

영화 <이퀼라이저 2,3> 속 그래피티와 스테인드글라스

  얼마 전 5월 5일 어린이날, 바람 불고 비 내렸지요. 어린이에게는 5월 5일이 생일 다음으로 기대 가득한 날이었을 테고 마침 일요일이라 열 손가락까진 아니어도 다섯 손가락은 꼽아가며 기다렸을 축제일입니다. 하필 그날 주룩주룩 비가 내렸습니다. 멍든 어린 가슴 많았겠지요. 하지만 아마도... 어린이들보다 행사 준비하느라 거의 일 년 여를 준비하는 관공서와 문화재단 관계자들의 가슴엔 피멍이 들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들인 예산과 부처 간 협력과 행사 성과를 두고 벌어지는 책임에 '날씨' 탓을 하며 온전히 자유롭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부처님 오신 날에도 비가 오더군요. 오시는 걸음에 흙탕물 좀 튀겼다고 언짢아하실 부처님은 아니시니 까짓 날씨 따윈 개의치 않으셨을 거예요. 부처님 뵈러 오시는 보살님들의 걸음도 꽃잎을 즈려밟듯 사뿐하셨을 거예요. 마음을 붙잡고 있는 분의 탄신(誕辰)에 감사드리러 오는 길이니까요. 다만 아마도... 연등과 음식과 말씀을 준비했던 사찰이 아쉽지 않았을까요. '날씨'가 거들어 주었다면 훨씬 다채롭고 풍성 해졌을 텐데 하고 말이죠. 


  웬 뜬금없는 날씨 타령이냐고요? 여느 해와는 다르게 올해 5월은 비가 잦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전 철저히 문과 체질인지라 날씨를 전년과 비교해 본다던가 통계를 확인해 본다던가 하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고찰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저 느낌이 확신입니다.ㅎㅎ 그리곤 비가 오니 부침개를 해 먹을까, 아니면 감미로운 음악을 들을까, 와인 한 잔에 영화 한 편 볼까 하는 대책 없는 낭만을 갖고 있을 따름이지요. 


  어제도 비가 왔습니다. 제법 굵고 세게 내리는 빗방울이었어요. 드뎌 비 맞으며 호수공원을 뛰었습니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비를 함빡 맞으며 하낫 둘 셋 넷 구령을 부쳤습니다. 레깅스와 운동화가 푹 젖었습니다만 자아의 거름망에 걸려있던 못나고 껄쩍지근한 감정의 오물들이 뚝뚝 떨어지는 빗물과 함께 바다에 접한 시화호로 떨어졌습니다. 제 옹졸한 감정들은 드넓은 바다에 가 익사했을 것입니다. 


<이퀼라이저 3> 신규 포스터


  '땀'엔지 '비'엔지 젖은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샤워를 마친 후, 김치와 돼지고기를 다져 김치전을 부쳤습니다. 막걸리 한 병, 김치전 한 장을 준비하고 TV를 틀었더니 글쎄, 딱! 하고 '이퀼라이저 3' 재방을 하고 있지 않겠어요? 누군가는 타워팰리스를 선망하지만 전 제 집이 편안합니다. 누군가는 '허무'를 이야기하지만 전 이 막걸리 한 병과 김치전 한 장이 주는 소소한 '행복'을 애정합니다. 게다가 에~액숀 영화까지~~


  이퀼라이저(equalizer)가 '균형자'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으니 세상의 선과 악에 균형을 맞추는 자라는 뜻이려나요? 비 내리는 오늘도 로버트 맥콜(덴젤 워싱턴 분)은 쉬지 못합니다. 고담시를 지키는 배트맨처럼 그의 손은 선(善)이 숨 쉴 수 있도록 악(惡)을 조준하느라 여념 없습니다. 고단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그가 알았을까요? 예수님의 탄생 순간에 악이 공손히 찾아왔다는 사실을.


휴고 반 데 고스 <포르티나리 제단화 3부작 중 중앙 패널, 1475~1476>


    <포르니타리 제단화 3부작, 1475~1476>의 중앙 패널인 <목자들의 경배>입니다. 이 작품을 그린 휴고 반 데 고스(Hugo van der Goes 1430 또는 1440~1482)는 생전에 이미 성공한 화가였습니다. 귀족과 성직자들, 부르고뉴 법원, 교회 기관, 플랑드르 부르주아지 등 유력자들의 주문이 잇달았습니다. 이른바 '성공'이라는 계단에 올랐음에도 그는 심각한 우울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뎠습니다. 그는 1477년 겐트에 있는 작업장을 폐쇄하고 평수사(平修士)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수사가 된 이후에도 그림 제작은 이어졌습니다. 그에게만 예외적으로 수도 중에도 와인이 허락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그의 천재성이 갖는 섬세하고 우울한 기질은 탁월한 성경 해석과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종교화에서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붉은 옷을 입은 요셉은 신발을 벗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이곳은 신성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황금빛 광채에 둘러싸인 예수님 주위로 천사도 성직자도 동방박사도 목자도 소와 당나귀까지 모두 무릎을 굻고 탄생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이 축복하는 이 장소에 천사와 나란히 두 손을 모은 어두운 얼굴이 있습니다. '어둠의 천사'입니다.



  

  후대 사가(史家)들은 논문과 주석의 갈피갈피에 여러 해석을 풀어놓았습니다. 이 어둠의 천사는 곧 사탄의 존재와 위협을 상징한다거나,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모습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죄를 굴복시킨다는 의미라거나, 인간의 삶이나 선함 속에 교묘히 숨에 있는 죄의 모습이라는 높낮이가 다른 목소리였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다른 데 있습니다. 휴고는 왜 이 어둠의 천사를 굳이 우러르는 제단화에 넣었을까요. 그가 성소(聖所)의 위엄 아래 어둠의 천사를 그리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감상자에게 거의 해석의 절대지분을 허락하는 현대미술이었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더불어 인간의 땅에 상주하는 악도 태어났다."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 피 흘리는 시간 동안, 로버트 맥콜은 어린아이가 쏜 총에 맞아 쇼크 직전, 이탈리아 해안가 작은 마을 알타몬테에서 구조됩니다. 알타몬테는 작은 것도 나눌 줄 알고, 열린 마음과 겸손과 유머가 있으며. 광장에서 소피아 로렌의 <해바라기>를 볼 정도로 유쾌하고 낭만적인 곳입니다. 제게는 영화 속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그곳에선 도저히 나쁜 마음을 품으래야 품을 수 없겠다 싶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카모라'라는 마약 조직에게 지속적인 수탈을 당하고 있는 것만 유토피아와 달랐으니까요. 영화는 우리가 예상하는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정의의 수호자이자 선과 악의 균형자인 맥콜은 진중하고 깊은 마음을 가진 의사 엔초의 수술을 받습니다. 그의 피는 그의 등에서 흘러나와 선한 알타몬테 마을 주민들의 고통을 씻어 내립니다. 함께 차를 마시고 모자를 사며 생선을 굽고 초대에 응합니다. 그리고 악을 징벌합니다. 신의 피조물이라는 의미에서 인간 모두가 '평등'하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평등에 기초해 정의가 실현된다면, 선한 의도는 좋은 결과로 악한 시도는 나쁜 결말을 맺는 것이 '형평'에 맞는 정의가 되겠지요. 그는 결과적 정의, '형평에 맞는 정의'를 실현합니다. 마약을 들여오는 카모라 조직 두목인 빈첸트의 입에 마약을 털어 넣으니까요.  



  이퀼라이저 감독인 안톤 후쿠아(Antoine Fuqua)는 미술의 언어를 자신의 작품에 적절하게 구사해 수준 높은 예술적 어휘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명화와 조각들로 그득한 빈첸트의 저택을 통해 그의 허영심과 자부심을 읽게 했다면 빈첸트의 이마에 뚝뚝 떨어지는 피방울은 성 미카엘의 칼을 빌렸습니다. 그의 부하는 스테인드글라스에 현현한 미카엘 대천사의 칼에 맞고 빈첸트에게 떨어집니다.  



  미카엘은 하늘 군대의 사령관이자 빛의 왕자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하느님의 군대를 이끌고 사탄의 군대와 맞서 싸우는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 같으랴 (Quis ut Deus)"라고 외쳤으며 곧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민족의 '수호천사'로 여겨졌으며 오직 미카엘만이 유대교 경신례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 자리매김한 대천사입니다. 최후의 심판이 있는 날, 나팔을 불며 인간 영혼을 저울에 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탄은 미카엘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뒤 자신을 따르는 타락천사들과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안톤 후쿠아는 하늘에서 치렀던 천사와 사탄의 싸움을 알타몬테에서 맥콜과 빈첸트로 은유해 재현했습니다. 글쎄요, 이와 같은 일이 21세기만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종교화의 단골 모델이었던 성 미카엘은 가끔 화가들의 소심한 복수(^^)에도 활용되었습니다. 


 

귀도 레니 <성 미카엘 대천사, 1636>


1630년, 교황 우르바노 8세를 배출한 바르베리니 가문은 바로크의 간판스타, 귀도 레니에게 산타 마리아 델라 콘체지오네 데이 카푸치니 교회를 위해 대천사 미카엘의 그림을 주문했습니다. 귀도 레니는 조반니 추기경의 천박한 교양과 지나친 간섭이 때때로 화가인 그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지만 종교화의 대가답게 극적인 장면의 포착, 명료하고 웅장한 아름다움으로 미카엘을 묘사하여 성직자들의 탄복을 자아냈습니다. 단 한 사람 조반니 바티스타 팜플리 추기경만 빼고요. 로마의 군복을 입고 망설임 없는 칼을 든 미카엘의 발아래 짓밟힌 사탄의 얼굴에서 안목 있는 이들은 조반니 추기경의 얼굴을 발견했다는 전설이 4세기를 넘어 아직까지 전해져 옵니다. 흐흐


  혈혈단신으로 악을 물리치는 맥콜이 미카엘과 다른 점은 악에 대한 징벌을 시작하기 전, 반드시 현재와 미래를 선택할 기회를 준다는 점입니다. 감독은 21세기 인간들은 스스로에게 선과 악은 선택할 수 있으며 반드시 정의가 이긴다는 신념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요? 

정의의 여신 디케(Dike)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눈을 가리고 오른손엔 칼을 왼손엔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원래는 칼을 든 모습이었다가 실용과 사실을 근간으로 하는 로마시대에 공정과 공평을 상징하는 저울이 등장했고 15세기말 무사(無私)를 압박하는 눈가리개가 씌워졌습니다. 로마시대에도 인맥, 학연, 지연, 권력, 신분 등을 경계했던 게지요. 절대권력자 제우스와 법의 여신인 테미스의 딸로서, 사(私)를 죽이고 공(功)을 살리며 차별(差別)을 없애고 평등(平等)을 지향하는 그녀의 칼은 한때, 신속했고 단호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칼날도 무뎌지기 마련이지요. 엄정한 의지의 숫돌로 끊임없이 벼리지 않은 칼은 무도 자르지 못합니다. 시대가 혼탁해지자, 디케는 먼저 눈가리개를 벗었고, 저울의 눈금을 속였고, 칼은 녹슬기 시작했습니다. 


  '법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는 말은 빙하와 협곡 사이를 헤매다 크레바스에 빠졌습니다. 급기야 21세기의 지구는 어벤저스가 지키며, 다가올 매트릭스는 네오의 고군분투에 기대어 있고, 천국은 기독교인인지 천주교인인지 무슬림인지에 따라 입학 기준과 정원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현실에서도 가상에서도 심지어 영원에서도 '절대적 진리'나 '보편적 정의'가 심하게 흔들린 현재가 '균형자 로버트 맥콜'을 낳은 것이 아닐까요. 자비 없이 신속한, 형평에 맞는 정의의 실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문득 <이퀼라이저 2>의 아파트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graffiti)가 생각납니다. 



  허름한 아파트 조그맣고 아담한 파티마의 정원은 어느 날 난장판이 되었지요. 갱스터들이 줄 풀린 개처럼 난동을 부린 탓입니다. 정원은 사나운 개들의 이빨과 발굽에 물리고 파헤쳐진 것처럼 뒤집어졌고 벽에는 시뻘겋고 까만 낙서로 참혹합니다. 맥콜은 매일 낙서를 지웁니다. 마치 자신의 어둡고 거친 과거를 닦는 것 같습니다. 갱에게 형을 잃은 소심하면서도 반항심 많은 흑인 학생 마일스는 낙서를 닦고 있는 그를 보며 한 마디 던집니다.

  "빌딩 주인한테 하라고 해요."

  "누구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도 안 하지."

  로버트의 말은 영화 마지막까지 내내, 보는 절 불편하게 했습니다. 


  "누구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도 안 하지."


  250달러에 벽을 새로 그리기로 한 마일스는 죽은 형을 그린 스케치를 보여줍니다. 형은 권투선수였습니다. 그런 형의 주먹은 '신의 오른손'이었다고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래피티(graffiti)는 이탈리아어로 '낙서'라는 뜻입니다. 허가 없이 무단으로 공공장소나 건물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허가를 받은 그림은 '뮤랄(Mural)'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니 그래피티는 불법이고 범법이지요. 태생을 추적하면 뉴욕 슬럼 문화의 하나입니다. 고도화한 도시 문명의 혼외자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생아이든 혼외 자식이든 태어났으니 생명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 중심에서 자라지 못하고 빈민가나 골목길, 특히 뉴욕의 지하철에서 성장했습니다. 비난과 구속이 따랐지만 낙서란 애당초 하늘과 맞짱 뜨는 고층빌딩과는 연이 없지요. 


  대를 거듭하면 적자가 아닌 아들 중에도 뛰어난 인물이 나오는 법입니다. 문화의 혼외자였던 그래피티는 주류가 다가서지 못하는 낮은 곳에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보듬었고 정치와 사회에 대한 다양한 이슈들을 선점했습니다. 1960년 대 이후에는 물질문명의 수혜자였던 팝 아트와 연합해 브랜드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체불명의 영국 화가 '뱅크시', 미국의 장미셀 바스키야가 대표적입니다. 서안지구나 가자지구에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그렸던 뱅크시는 아직도 그래피티 계의 명불허전입니다. 이퀼라이저의 미술학도 마일스가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해진다면 제2의 뱅크시가 될지도 모르지요. 

  


  겁이 많고 삐뚤어지기 쉬웠던 마일스는 맥콜과의 만남과 사건들로 인해 반항청년에서 성숙한 어른이 되어 갑니다. 총과 마약 대신 다시 붓을 잡고 닳고 낡았던 벽에 이웃들의 내일을 지켜주는 희망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저 벽돌 위에 심어진 미래와 용기와 자긍심은, 물을 주고 제초제를 뿌려주는 식물처럼 매일매일 쑥쑥 자라날 것입니다. 


  오늘을 살기에 전전긍긍하며 무력함의 중력을 거스르려는 저는 비 오는 날, 부침개 한 장과 영화 한 편을 보며 힘을 냅니다. 그리고 이미 떠나간 마일스 형의 주먹을 그리워합니다. 그의 주먹은 '신의 오른손'이었으니까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비 그친 저녁,  저 벽돌 위에 파릇파릇한 먹거리들처럼 내일 저는 제 마음밭에 상추와 깻잎과 쪽파와 미나리를 심어보겠습니다. 



#이퀼라이저3

#그래피티

#스테인드글라스

#소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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