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그대 3. 퀜틴 마시스 <환전상과 그의 아내>
몸에서 떨어져 자꾸 엎어지는 그림자를 부득불 의자 위에 앉혀 놓고 꼬박꼬박 책을 읽습니다. 베개로 쓰기 딱 알맞은 벽돌 사이즈인 데다 그림이라고는 한 점 없이 일관성 있게 지루합니다. 기합이 빡 든 글자들은 매스게임하듯 나란히 줄을 맞춘 차렷 자세로 어떻게 해야 돈을 효율적으로 버는지, 눈덩이처럼 굴리는지를 자근자근 웅변합니다. 10포인트 함초롱 바탕체가 단정하기 그지없습니다.
문제는 돈은 좋아하는데 ‘돈의 속성’이라든가 ‘돈의 심리학’을 배우는 건 지루해하는 저의 이중성입니다. 일 초씩 건너뛰며 커피를 마셨다 강정을 깨물었다 급기야 냉동실 초콜릿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아~ 낮에는 에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을 읽고 밤에는 보들레르의 시와 와인에 취하는 날들과 돈이 서로 친할 수는 없는 걸까요? 돈의 갑옷을 입고 돈키호테의 말을 빌려 툴루즈 로트렉의 물랭루주로 돌진할 수는 없는 걸까요? 돈은 시와 그림과 술과 낭만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요? 이렇게 원초적 욕망을 지하에 쑤셔 넣으면 부풀고 끓어올라 급기야 지진이나 화재가 난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요?
소중하고 귀한 우리의 소방대원을 부르는 참사를 일으키기 전, 단호히 책을 덮었습니다. 휴우~ 마음이 놓입니다. 대신 전화를 겁니다. 20분 지나면 야릇하고 오묘하고 향기로운 치킨이 배달될 것입니다. 심신이 안정되자 떠오르는 그림 한 점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금화'가 등장하는 탁월한 작품이지요. 오래도록 잊혔다 이 작품으로 플랑드르 화파를 창시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퀜틴 마시스(Quentin Matsys, 1466~1530>의 <환전상과 그의 아내, 1514>입니다.
훌륭한 작품에 대한 판단은 나름 다를 수 있지만 누구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요소는'작품 속 작은 것 하나도 의미 없는 것은 두지 않는다.'입니다. 선, 색, 구도 등 기본 요소는 물론이거니와 화면 속 작은 디테일도 허투루가 없습니다. 그 정치(精緻)함으로 깊은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 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는 말은 훌륭한 작품에 대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자 우러르는 찬사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 조건에 아주 잘 맞는 명작이지요.
초록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부부의 회청색과 붉은색 옷은 두 캐릭터를 선명히 대비시킵니다. 남편은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저울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벨벳 위의 진주, 두루마리에 끼운 보석 반지, 여러 나라의 동전 등은 누가 볼세라 얼른 주머니에 넣고 싶을 만큼 사실적이고 유혹적입니다. 네 개의 반지를 제 손가락에 다 끼울까요? 진주로는 목걸이와 귀걸이를 만들 수 있겠지요? 제가 눈독을 들이는 사이 남편은 저울에 금화를 비롯한 다양한 동전의 무게를 재며 금의 함량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금이나 주화를 저울에 다는 작품은 가톨릭 세력이 강한 지역, 프랑스나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돈을 다루는 일 자체가 천하고 금기시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향(本鄕)에서 쫓겨나 땅이 없던 유대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북유럽은 수평선 너머, 또 다른 세상을 향해 거친 항해를 떠났던 모험가들의 땅이었습니다. 당시 플랑드르의 도시였던 안트베르펜과 브뤼셀은 유럽 북부와 남부의 경제 교차로이자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들의 배 갑판에는 이국(異國)의 풍물과 진귀한 물건, 그리고 다양한 주화가 있었습니다. 일관된 법정화폐가 보급되지 않은 탓이지요. 그래서 가치의 교환은 금의 함량으로 정해졌습니다.
아내는 삽화가 있는 기도서를 보고 있습니다. 낯섭니다. 여인과 책의 조합은 16세기엔 너무 낯선 장면입니다. 그만큼 여성의 지적 활동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기도서라 할지라도 읽고 쓰는 일은 남자의 몫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책은 아주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고급스러운 장정에 풍부한 삽화가 있는 책을 본다는 건 그만큼 교육을 받았고 재력이 있다는 얘기지요. 모피로 덧댄 칼라와 소매가 부연 설명하고 있네요.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는 부유하고 신심 깊은 여인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부의 모습은 언뜻 보면 16세기 플랑드르 무역 도시의 신흥 부르주아 생활을 그린 장르화 같습니다.
하지만 퀜틴 마시스는 한결 노련하고 웅숭깊은 화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캔버스에 신비하고 은밀한 질문을 숨겼고 우리가 그것을 찾아 답하기를 바랐습니다. 부부의 뒤편 선반 위를 살펴봅시다. 투명한 유리병과 길게 꿰어진 구슬, 양피지, 사과, 닫힌 책과 상자, 접힌 간이 저울, 불 꺼진 양초가 있네요. 이곳은 환전소입니다. 어이없게 주방에 제초기가 있는 꼴이지요. 그러니 조금만 더 생각합시다. 조금 전, 명작은 의미 없는 것을 두지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물이 담긴 투명한 유리병은 도상학에서 무염시태(원죄 없는 잉태)를 뜻합니다. 물병과 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통과하는 빛이니까요. 그 아래 여섯 개의 구슬은 성모님을 또는 인간의 약함을, 책은 영원한 진리를, 아내 뒤편의 불 꺼진 양초는 죽음을 상징하지요. 사과는 원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과는 저울을 들고 있는 남편의 머리 위에서 위태롭습니다. 일상에서 물질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최후 심판의 날에 영혼의 무게를 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반 위는 인간의 약함과 허무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다면 16세기 초, 세계의 슈퍼마켓이었던 플랑드르의 화가, 퀜틴 마시스는 일시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영원한 것과 신성한 것, 탐욕과 도덕 사이의 균형을 바라며 이 작품을 그렸을까요?
그는 통찰력 있게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볼록거울이 보이세요. CCTV가 없던 시대, 볼록거울은 한 곳에서 실내 전체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마녀의 눈'이었습니다. 마녀의 눈 속에 십자가 모양의 창틀이 보입니다. 그 너머 푸른 하늘과 고딕 성당의 종탑도 보입니다. 종지기는 "오늘도 좋은 하루~"하는 신의 소리를 전하겠지요. 오른쪽 아래엔 붉은 터번을 둘러쓴 수수께끼 인물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 거울은 진실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화가는 은근슬쩍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년경~1441년 화가)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을 본떠 어떤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수께끼 인물은 책을 읽고 아내는 기도서를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속죄의 상징인 양과 지혜롭고 자애한 성모님 사이에서 그녀의 손이 멈춰 있습니다. 어느 페이지를 펼칠지는 알 수 없는데 그녀의 눈은 이미 반짝이는 금화를 곁눈질하고 있네요. 섬세한 퀜틴 마시스는 신의 말씀을 듣는 시간임에도 금화에 흔들리는 그녀의 마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흔들렸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기존의 종교적, 도덕적 가치와 새롭게 등장한 '부(富)'는 끊임없이 충돌하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화가는 끝내 저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우리에게 선택권을 넘기는군요. 혹시 화가는 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을 금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500여 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제 주위의 모든 것들은 화려하고 동시에 아이러니합니다. 고층 빌딩 유리창은 태양보다 번쩍거리고, 60km가 제한속도인 도로엔 시속 300km의 람보르기니가 거친 숨을 내쉽니다. 영하의 날씨에 유모차에 태워진 화이트 포메라니안은 눈길에 뒤뚱거리는 꼬마의 걸음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소수의 몇을 제외하고는 인간들이 선망하는 귀한 명품은 백화점 쇼윈도 속 마네킹 차지입니다. 마네킹보다 아름답게 환생한 아프로디테는 지하철 벽면에 서서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너도 나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어. 금화를 들고 이 병원으로 와.”
반짝이는 게 다 금이 아니듯 돈이 곧 행복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제 반짝이지 않는 금이 존재하지 않듯 가난한 행복은 이루기 어려운 듯싶습니다. ‘금화’는 점점 더 힘이 세져서 18세의 몸을 갖기 위해 45세의 남자가 매년 25억을 쓰는 방법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신의 축복’이라고 했던 건강도,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죽음’도 금화엔 맥을 못 추는 듯싶습니다. 흠... 다시 그 벽돌책을 펼쳐야 하나?
“딩동”
치킨이 왔나 봅니다. 엥? 어머, 804호 아주머니가 참외를 들고 오셨네요. 마침맞게 치킨도 도착했습니다. 제 집엔 맥주가 있습니다. 우린 치맥으로 천국에 입성한 후 참외로 천국에 드러누웠습니다. 쳐다보아 줄 이 없는 에르메스 백, 입고 나갈 곳 없는 족제비 외투, 소통하는 이 없이 사는 넓은 아파트, 아름답다 추앙해 줄 애인 없는 미모, 달릴 도로 없는 세단, 여름밤 함께 치맥 할 친구 없는 인생은 얼마나 허무한가요. 어쩌면 위험과 고통마저도 친구와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능히 견딜만하지 않겠어요?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림 오른쪽 문밖의 두 남자네요. 무슨 얘기인지 엿듣고 싶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작습니다. 아마도 상징과 은유의 알레고리가 풍성한 이 작품의 마지막 말풍선을 화가는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 놓았나 봅니다.
“환전소엔 왜 왔나?”
“결혼반지를 돈과 바꿀 수 있을까...”
“결혼반지는 왜 바꿔?”
“빵이 없어서.”
“이런, 일단 점심시간이니 내가 양 많고 맛있는 점심을 사주지. 와인도 사주고 말이야. 든든히 먹고 나면 결혼반지를 맡기지 않아도 좋을 아이디어가 떠오를 게야. 어서 나랑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