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노라 Jun 11. 2024

젊어지려면 '사랑'하세요

마흔, 그대 2. 루카스 크라나흐 <젊음의 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며칠 전 이사 왔다는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몹시, 넘치게 반가워하시기에 전 혹시 왕래가 끊긴 먼 친척인가, 먼지 폴폴 나는 제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새로운 이웃은 신속히 저의 신상명세와 가족관계를 묻더니 제 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이가 어떻게 돼요?" 하며 열림버튼을 눌렀습니다. 제 대답을 듣기 전에는 열림버튼에서 손을 떼시지 않을 것 같았어요. 친절하게도 당신과 비슷할 것 같다고, 친구처럼 지내자고도 하셨지요. 당황스럽기도 난감하기도 해 "몇이신데요?"하고 물었습니다.

  "아~ 전 65이에요."


  오늘 그분이 심하게 체했다거나 무릎관절이 아프다거나 엉덩이에 궤양이 생겼다거나 한다면 그건 제가 한 짓입니다.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쿠션을 노려보았거든요. 그 이웃 아주머니의 얼굴을 떠 올리며 긴 대바늘로 사정없이, 머리며 가슴이며 무릎이며 엉덩이를 팍팍팍 찔렀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숲 속 일곱 난쟁이를 불러 독사과도 배달시킬 예정입니다.  


  르네상스의 천재인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아담의 창조'를 통해 보디 빌더의 근육을 가진 하나님을 창조했습니다. 그로 인해 16C 초부터 지금까지, 백발의 짐승남인 하나님은 당신의 저택 천장에서 자신의 영적 대리인인 '교황'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은 영원히 늠름하고 건장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은 안.타.깝.게.도. 늙습니다. 


  전 '젊음'을 갖고 싶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술을 금하고 숙면을 취하며 피부과를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성의가 있어야겠지요? 이 생(生)에서 '나라' 정도는 구해야겠지요? 벌써 한숨이 나옵니다. 하지만 염치없이 저만 다음 생에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꿈꾸는 건 아니랍니다. 500여 년 전에도 인간은 주름을 다림질했습니다. 루벤스 못지않게 에로티시즘이 충만한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의 <젊음의 샘, 1546>입니다.



루카스 크라나흐 <젊음의 샘, 1546>


 그림 왼쪽 먼 곳에 시선을 압도하는 바위가 줄지어 있습니다. 바위의 모양과 크기가 비현실적인 데다 꼭대기에 넓은 성(城)이 있네요. '이곳은 이성(理性)이 닿는 곳이 아니다'라는 표지판으로 읽습니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수평 이동하면 구릉지대를 건너 인간이 사는 마을과 숲이 어어집니다. 강 위, 돌로 만든 아치다리를 건너면 또 다른 성이 위용을 자랑합니다. 


  인간의 마을로부터 숲으로 이어진 넓은 길을 따라오면 중세의 목욕탕을 연상시키는 넓은 직사각형 샘(?)이 보입니다. 샘의 왼쪽에는 힘들고 오랜 여정을 마친 나이 든 여인들이 말과 수레, 가마 등을 타고 막 도착했습니다. 업혀온 노부인도 있네요. 머리에 흰 두건을 쓴 사람도 보입니다. 이들은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 환자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그녀의 얼굴이 검지 않은 것을 보면 단순히 병들고 노쇠했다는 생각입니다. 



  제작시기가 인간 중심인 르네상스의 영향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거장 루카스 크라나흐 내면의 색다른 유머 코드 때문이었을까요? '젊음의 샘'은 나름의 수질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남성 입장 불가'입니다. 샘에 몸을 담근 이들은 모두 여자입니다. 게다가 가슴이 조랑박처럼 늘어진 노부인을 자세히 관찰하는 붉은 옷의 의사를 보고 어찌 크라나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의 눈에 색욕이나 탐심이나 조롱이나 무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신체에서  '늙음'과 '쇠함', '질병' 등을 학문적으로 진단하려는 진지함만이 보입니다. 노부인을 직접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멀리 두고 옷을 들고 서있는 남자의 반듯한 매너는 인권 개념이 부족했던 16세기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존중'까지 느껴집니다. 작품은 활달하고 생동감 넘치는 생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여인들은 서로 물을 끼얹고 어서 오라고 잡아당깁니다. 걱정, 근심과 함께 '늘어지고 주름진 어제'가 사라졌습니다. 물에 잠겨있는 동안 늘어진 살과 시든 팔, 빛바랜 머리카락, 삶의 영양소를 파괴하는 통증과 우울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샘의 오른쪽에는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팽팽한 팔과 다리, 봉긋 솟은 젖가슴의 소녀들로 변한 여인들이 서로를 희롱합니다. 그림이 그려질 당시, 젊은 여성 누드의 이상적 아름다움은 창백한 얼굴, 작고 높은 가슴, 금발, 둥글고 불룩한 배, 가는 팔이었습니다. 화가는 민주적 이게도 이 이상적 아름다움을 평등하고 고르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흙'을 뜻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는 인간을 의미하는 '휴먼(Human)'의 뿌리입니다. 인류의 장자(長子) '아담' 역시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אדמה)'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이 작품은 인간이 '흙을 물에 개어 빚은'이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아마도 세례 때 성수(聖水)를 뿌리는 것이 우연은 아니겠지요.


  루카스 크라나흐는 알프레드 뒤러, 한스 홀바인과 함께 독일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입니다. 자신의 출생지였던 크로나흐를 기리기 위해 ‘루카스 뮐러’라는 이름을 두고 ‘크라나흐’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희미하며, 1501년 빈으로 옮겼다가 1505년 비텐베르크에 정착했다고 알려집니다. 초기에는 북구(北歐)의 서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독일 삼림(森林) 풍경을 시적(詩的)으로 그려냈으며 중세의 경직을 벗어나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적이고 에로티시즘적인 작품으로 주의를 끌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인간과 자연, 어느 한쪽 치우침 없이 화면에 고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그는 '늙고 병듦'을 따뜻하게 포옹합니다. 샘을 나온 여인들을 보세요. 세련되고 멋진 귀족의 안내를 받고 붉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미스 유니버스 대회장 런웨이를 걷는 여인들의 당당한 걸음과 우아한 미소를 보실 것입니다. 조금 전, 들 것에 실려왔던 노인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생명력이 넘치고 성(性)적 활력으로 눈부신 매력을 장착한 젊음이 저 붉은 커튼을 열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들을 기다리는 건 자연이 감추어 둔 풍성함입니다. 한껏 치장을 한 여인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젊은 신사들과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고개를 들고 환히 웃는 얼굴에서 기쁨과 설레임, 황홀함이 보입니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드럼과 피리 소리가 들리고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합니다. 달팽이 요리가 아니어도 와인, 빵, 생선이 가득한 저 만찬은 5성급 호텔 파티가 부럽지 않겠지요. 첫눈에 반한 연인들은 숲 속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합니다. 부럽군요. 도대체 저 샘은 어떻게 이런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것이지요?


   아하, 샘 가운데 우뚝 솟은 분수의 조각상이 아프로디테와 에로스군요. 루카스 크라나흐는 슬그머니 단서를 흘려 '젊음의 샘'이 미와 사랑의 신이 힘을 발휘하는 환상의 공간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에게 엎드리기보단 풍부하고 독창적인 인간의 상상력을 믿었던 그는 우리에게 캔버스 한가운데, 숲으로 난 길을 따라 젊음의 샘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금주, 금연에 나라를 구하기엔 정신과 육체 모두 연약한 우리에게 주는 따뜻한 위로입니다.


  소심한 복수가 끝나고 TV 앞에 앉았습니다. 하나같이 책에 있거나, 무덤에 누웠거나, 스크린에서 웃고 있거나 하는 제 이상형 찾기에 집중합니다. 아직 루카스 크라나흐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젊어지려면 '사랑' 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