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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Oct 26. 2022

과거를 배웅합니다

마흔, 그대 1. 핸드릭 아베르캄프 <스케이터가 있는 겨울 풍경>

  병문안을 하고 돌아오는데 마른 도시에 진눈깨비가 내렸습니다. 윈도우 브러시가 그리는 포물선 사이로 물을 잔뜩 머금은 눈이 속절없이 떨어졌습니다. 오래도록 감지 않은 머리의 비듬처럼 세상의 쉰내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카 드라이브엔 우울한 냄새를 탈취해 줄 마땅한 음악이 없더군요. 


  오갈 데 없는 도시 신호등 아래, 우두망찰 멈췄습니다. 내려앉을 듯한 하늘의 무게에 짓눌려 건물들은 납작했고 그 사이사이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무표정했습니다. 전 겨울의 속도보다 빠르게 차를 달렸습니다. 집 근처 카페 유리창에 당근 코를 한 날씬한 눈사람이 서 있던 게 떠 올랐거든요. 지나칠 때마다 검고 동그란 눈을 깜박이면서 어서 들어와 뜨거운 커피 한 잔 마시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똘망한 눈으로 제 가슴이 차갑게 얼어 있다는 걸 보았던 것일까요? 


  달려온 카페는 아직 눈에 젖지 않았더군요. 날씨 탓인지 창가 쪽은 꽉 차 있었습니다. 엉거주춤 통로 쪽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자마자 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오랜 제 친구는 이 풍경을 보지 못하겠지요. 


 그녀는 눈이 어둡습니다. 차츰차츰, 시나브로 시신경이 말라 지금은 한 치 앞 정도만 보입니다. 하긴 한 치 앞도 못 보는 세상이니 그녀의 시력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네요. 세상을 보는 데는 나쁘지 않은 시력이 자전거를 타는 데는 몹시 나빴나 봅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의 오른쪽 어깨부터 다리까지 온통 붕대에 감겨 있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애가 무슨 자전거야?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랬어."

  화가 나 퉁망을 주었습니다.

  "과거와의 작별이 쉽지 않네. 타보고 싶더라."

  그녀는 입으로 웃고 눈으로 울었습니다. '웃프다'는 말의 현장실습입니다. 

  

  과거도 배웅이 필요한 걸까요. "캄펜의 말없는 자"라는 별명이 붙었던 핸드릭 아베르 캄프(Hendrick Berentsz Avercamp, 1585~1634)의 <스케이터가 있는 겨울 풍경, 1608>입니다.



핸드릭 아베르캄프 <스케이터가 있는 겨울 풍경, 1608년 경>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해 무겁게 내려앉았고 양쪽으로 바람도 안쓰러워할 만큼 가늘고 마른 가지들이 높이 서 있습니다. 시선을 멀리 두어도 망막에 닿지 않는 지평선이 땅과 하늘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이 동화의 나라에 북극 산타는 루돌프를 타고 오고 평범한 인간은 스케이트를 타고 옵니다. 


  예나 지금이나 눈 내리는 겨울은 모두를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리지요. 빙판 위에는 썰매와 스케이트를 타는 남녀들, 'kolf'를 하는 신사들, 무리 지어 수다 떠는 숙녀들, 꽈당 넘어진 아이와 그 광경을 바라보는 꼬마, 물에 빠진 이를 구하려 두 팔을 벌린 사람까지 생생한 삶의 표정이 담겨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을 보세요. 손도끼를 든 손으로 긴 낚싯대를 받쳐 어깨에 걸치고는 느긋하게 걷는 어부가 보입니다. 음~ 달랑거리는 생선은 오늘 아끼는 손주 입으로 들어가겠지요. 


  핸드릭 아베르 캄프가 태어났던 시기는 지금보다 평균기온이 훨씬 낮았던 소빙하기에 속합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계속되는 정치적, 종교적 마찰을 겪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매섭고 삶은 거칠었던 때, 그는 말을 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유전형질을 받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런 신체적 장애가 그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더 깊고 내밀한 눈을 갖게 했을까요? 




  그는 애정을 가지고 오래도록 천천히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낚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렸던 소리를 캔버스라는 그물에 담았습니다. 그는 생선 비늘을 상하게 하지 않는 노련한 어부였지요. 다양한 군상들의 발랄함과 색채의 명랑함, 수다스럽지만 사랑스러운 일상들을 섬세하게 배치했습니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소란함 속의 고요"는 신이 그에게 내린 은총, 즉 언어가 아닌 이미지의 무한함을 알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녀의 전화입니다.

  "친구야, 고마워. 잘 도착했어?"

  전 대답했습니다.

  "아직 네 옆에 있어. 스물세 살의 네 옆에." 



  언어가 닿으면 이미지는 덴다고 합니다. 시간이 추억에 닿으니 친구는 찰과상을 입는군요. 하지만 가슴속에 부지깽이를 안고 있는 눈사람처럼, 과거의 모든 것은 내 것이지만 또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들을 안고 저마다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눈이 그치면 더 적게 말하고 더 깊이 보며 더 많이 느끼고 싶습니다. 이제 그림자가 길어진 겨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습니다. 쏟아지는 눈과 함께 과거를 배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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