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스키 <방문자>
햇빛이 투명합니다. 공기가 가볍습니다. 늦은 점심인지 그림자가 하품합니다. 발뒤꿈치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행여 시간을 깨울까 문틈으로 살짝 엿봅니다. 발에 눈을 달고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호기심이 달립니다.
초대를 받은 걸까요?
소년들은 빈 손입니다. 초대장도 없이 턱시도도 걸치지 않고 윤나는 더비도 신지 않은 맨발로 아무도 두드리지 않은 대문으로 한 걸음 내디뎠습니다. 초대받지 못한 방문자가 여는 비밀의 정원입니다. 다행히 보랏빛 꽃이 경비를 서고 있네요. 넝쿨로 길을 막지 않은 걸 보니 아마도 모르는 척 들여보내 줄 것 같습니다.
세 소년 중 진한 남색 모자를 쓴 아이의 투지를 보세요. 이슬도 벨 것 같은 눈빛입니다.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말 거야' 하는 의지에 차 있습니다. 곁에 선 금발소년은 초조한 발가락이 말을 하네요. "무섭기도 하지만 너무나 궁금해."라고요. 갸웃한 고개가 이미 정원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두 손으로 대문을 꼭 쥐고 있는 아이는 가장 어린가요? 겁먹은 얼굴이 너무나 귀엽습니다. "우리 그만 가자."는 거겠지요. 일상이 시로 변한다면 바로 이런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작품 <방문자, 1913>를 그린 니콜라이 보그다노프 벨스키(Nikolai Petrovich Bogdanov-Belsky, 1868~1945)는 러시아 화가입니다. 그는 그늘진 곳에서 출생한 사생아였습니다. 어머니가 날품팔이었다고도 하고 가난한 농노였다고도 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세 살쯤 되었을 때, 니콜라이 보그다노프는 저 남색 모자의 소년처럼 비밀스러운 문을 열고 한 걸음 내디뎠습니다. 그 문은 벨스키 다테보(Belsky Tatev) 마을의 인민학교 대문이었습니다. 모스크바 대학교수였던 라친스키 세르게이가 가난한 농노의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만들었지요. 러시아 역사의 혹한기였던 1867년이었습니다.
라친스키는 니콜라이 보그다노프의 명민함과 탁월한 재능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화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넝쿨을 걷어내고 길 위에 등을 비추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보그다노프의 명성은 높아졌고 그의 작품은 황후와 귀족들의 저택에 걸렸습니다. 1914년에는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학자로 불렸습니다. 그는 보그다노프라는 성(性) 뒤에 자신이 자란 벨스키라는 지명을 넣어 보그다노프 벨스키로 활동했습니다.
우린 모두 문을 빼꼼히 열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신비스러운 정원을 들여다보는, 바로 저 소년들입니다. 어떤 모습이든 아름답네요. 설레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립니다. 저 정원 안에 무엇이 있는지 같이 산책합시다. 어쩌면 '설레는 내일'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와 ‘길을 안내해 줄 스승'과 ‘함께 얘기 나눌 그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마흔, 그대(마음을 흔든 그림과의 대화)의 문을 여시겠어요?
트루먼 쇼의 명대사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Good morning, Good afternoon, Good eve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