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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Feb 27. 2023

한 발엔 구두, 한 발엔 운동화로는 산책할 수 없다

마흔, 그대 9. 파벨 페도토프 <소령의 구혼>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다시 이십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어?"


  "돈 많았으면 좋겠어."

  "사회적 지위도 있으면 좋겠어."

  "잘 생겨야지. 아니다. 그보단 식스팩의 몸짱."

  "별소릴. 다정하고 배려심 많고 유머가 있으면 좋지." 

  "난 시부모님이 좀 멀리 살았으면."

  우린 빵 터졌습니다. 


  남자의 이상형을 찾듯 다시 이십대로 돌아간다면 만나고 싶은 여자의 이상형도 있겠지요? 미인이라면, 함께 직장 생활한다면, 다정하고 애교 있었으면, 음식을 잘한다면, 상대 집안이 경제적 여유가 있었으면, 지혜로우면 좋겠다 등등의 조건들 말입니다.


  그럼 누군가는 야멸차게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당신을 만난 대요?"


  우린 제발 이러지 맙시다. 소박한 환상이 갖는 긍정적 에너지를 '자신에 대한 객관화'라는 이름으로 콕콕 찌르며 냉정한 거울을 보게 하진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이상형은 지난한 삶을 통과하며 갖는 '소심한 희망'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 무수한 조건의 "~~ 면 좋겠어" 뒤에는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의 존재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면"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걸 다 알기 때문입니다.


   결혼의 계절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차가운 대지, 러시아에서도 봄이 한창입니다. 봄의 전령사 파벨 페도토프(Па́вел Андре́евич Федо́тов, 1815-1852)의 <소령의 구혼, 1851>입니다. 



파벨 페도토플 <소령의 구혼, 1851>


  사탕으로 만든 드레스인가요? 깨물면 '사르락' 소리가 나거나 맛보면 달디 단 향내가 입 안에 감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훽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아직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운 풋내 나는 아가씨인 모양입니다. 서두르는 발치엔 레이스 손수건이 떨어져 있네요. 뭔가 몹시 실망해 이 자리를 급히 뜨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런 그녀의 드레스 뒷자락을 잡는 여인이 있습니다. 광택이 요란한 옷과 두른 숄이 값비싸 보입니다. 그녀의 손은 "지금 가면 어떻게?"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뒤편, 허연 수염이 풍성한 남자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네요. 붉은 코트를 입은 여인의 손은 문 앞의 한 남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남자는 짐짓 어색한 듯 어린 아가씨의 모습을 외면합니다. 허리에 손을 대고 오른손으론 벽을 짚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언짢은 기색이 역력합니다. 간신히 예의를 차리고 있군요. 남자의 카이젤 수염이 고루하고 근엄해 보입니다. 무슨 일이죠?




  19세기, 겨울왕국인 러시아에도 네바강을 통해 서구의 물결이 넘실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유구한 전통에 기댄 왕족과 귀족들은 여전히 품위와 격식을 고수했지만 급물살을 탄 자본의 훈풍은 몇몇 상인을 귀족에 버금가게 반짝거리게 했습니다. 금화가 주는 위력이었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광채였지요. 가문이 보관하는 훈장 말고는 딱히 반짝거릴 게 없던 귀족들에게 상인의 딸이 가져오는 지참금은 외면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또한 신분제 사회에서 부유한 상인에게 주어지는 신분상승의 기회는 '지참금의 효용'으로는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둘은 신분과 금화의 거래를 원했습니다. 


  앵돌아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 아가씨의 어머니는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기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을 것입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딸에게 그동안 들인 '공(功)'을 얘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평민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돈이 돈답게 쓰일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깟 '사랑'이 대수냐고 쥐어박고 싶었을 것입니다. 속 너그러워 보이는 수염 허연 아버지는 느지막이 얻은 귀여운 딸의 사위가 너무나 늙수그레해 내심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붉은 옷을 입은 매파와 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는 왼쪽의 하인들만이 오늘 밤, 자신들의 처지에 다소나마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니콜라이 1세는 전근대적 농노제를 기반으로 위태로운 사회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보수적인 귀족, 타락한 관리, 부패한 수도사, 이들의 호위무사인 비밀경찰들을 축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과거로 돌렸습니다. 바퀴 아래엔 무수한 농노들의 땀과 눈물이 흘렀습니다. 러시아의 대지는 늪으로 변했고 수레는 허우적 댔습니다. 


  파벨 페도토프는 풍자와 해학으로 이러한 현실을 담아냈습니다. 그는 붓으로 전통을 비틀었고, 역사를 향해 울고 웃었습니다. 그가 도배공이 되어 붙인 호화로운 벽지 위엔 새로운 시대의 물결을 외면하는 성자들의 얼굴이 완고합니다. 우스꽝스럽게도 네바강을 따라 도착한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을 뿌리며 한 공간에서 흔들립니다. 신분과 금화가, 낡음과 새로움이, 사랑과 조건이, 과거와 미래가 부딪치고 거꾸러지는 시대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시대도 여즉 이 충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의 결실이 '결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결혼한다고 한다면 그건 발이 편안한 신발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9cm의 하이힐을 신고 있다면 그도 같은 높이의 구두를 신고 함께 걸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가 2cm의 운동화가 편하다면 그도 같은 운동화를 신고 함께 달릴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한 발엔 운동화를 한 발엔 하이힐을 신고서는 오래 산책할 수 없을 테니까요. 


  페도토프는 작품에 창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밖을 볼 수 없지만 세상엔 봄이 오고 있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샹들리에보다 금화보다 더 반짝이는 꽃을 선물했습니다. 봄이 되면 매화가, 산수유가, 개나리가, 진달래가, 목련이, 벚꽃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핍니다. 봄이 오면 저도 다시 결혼하고 싶어 질지 모릅니다. 


  돈 많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시댁이 멀리 있고, 잘생기고, 식스팩의 복근이 있는데 다정하고, 배려심 많고, 유머까지 있는 남자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런 남자가 "꽃구경 가자."라고 한다면 그만 열 번이라도 결혼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만약... 꽃구경 가자는 남자가 데이트 비용이 부족하고, 직장이 없고, 평범하게 생기고, 복근은 꿈도 못 꾸지만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웃음이 나고 절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일단 데이트를 하고 나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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