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그대 10. 오딜롱 르동 <키클롭스>
전 비 오는 날의 놀이터를 좋아합니다. 다 큰 어른이 놀이터에서 눈치 보지 않고 놀려면 비가 와야 합니다. 비 오는 날엔 아이들도, 그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새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계절을 태운 그네, 추억이 미끄러지는 미끄럼틀, 빗방울의 무게를 재는 시소만이 놀고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우산을 쓴 채 놀이터 바닥에 깔린 고무매트 위를 통통 뛰거나, 맨발로 동그랗게 모여있는 모래 위를 걸어봅니다. 모래가 간지러운지 발바닥이 재채기를 하지요.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문득 비를 맞고 싶겠지요?
우비를 푹 둘러쓰고 납작한 슬리퍼를 신고 놀이터로 나갔습니다. 빗방울이 거세 우비 속 제 민머리를 사정없이 때립니다. 얼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툭툭툭툭툭툭툭툭’ 낙하산도 펼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떨어지는 비는 제 우비 위에서 미끄럼을 탑니다. 전 신이 나서 겅중겅중 걸었습니다. 그넷줄이 끊어질까 염려는 되었지만 막무가내로 그네도 탔습니다. 평소 타 보고 싶어도 아이들을 밀어낼 자신이 없었거든요. 폐타이어를 허들 삼아 폴짝폴짝 뛰기도 합니다. 천천히 천천히 숨을 들이쉰 다음 두 다리를 힘껏 올려서 솩~ 건넙니다. 으쓱해집니다. 와아~ 행복합니다.
마음은 뽀송뽀송했고 몸은 홈빡 젖었습니다. 기실, 우비는 비를 막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마저 입지 않고, 늙수그레한 아줌마가 놀이터에서 혼자 뛰고 구르고 낄낄대고 웃고 있으면 신고 들어갑니다. 저도 이 사회의 규칙과 상식을 존중하며 삽니다. 전 성실하고 얌전한 소시민입니다. 가끔 탄수화물을 뺀 쌀밥이나 비타민 없는 오렌지 같은 생각을 하긴 합니다만...
행복한 저녁입니다. 빗물에 어룽대는 아파트 불빛이 프랑스 상징주의 화가였던 오딜롱 르동(1840~1910)의 작품 <키클롭스, 1898~1910>의 눈 같습니다.
키클롭스(Κύκλω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눈이 하나인 괴물입니다. '원형의 눈을 한', '둥근 눈 circle-eyed'의 의미여서 이마 한가운데 눈이 있습니다.
신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라 여러 버전이 있습니다. 오딜롱 르동의 '키클롭스'가 오디세우스에서 한쪽 눈이 찔린 그 '폴리페무스'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어쨌든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키클롭스는 바다의 신 네레우스의 딸이자 시칠리아 바다의 님프인 '갈라테이아'를 사랑했습니다. 갈라테이아는 가수였다면 노래로 부르고 싶을, 화가였다면 그림으로 그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거칠고 우락부락한 키클롭스도 그녀 앞에 서면 한없이 부드럽고 작아졌습니다. 키클롭스는 외모에 신경을 썼고 파도와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녀의 귀에 닿도록 피리도 불었습니다.
하지만 갈라테이아는 미남 청년 아키스를 연모했습니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둘의 사랑'은 쉴 새 없이 솟아났고 인근 꽃과 초목들 사이에 서로의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갈라테이아와 아키스는 손을 꼭 잡고 다니며 사랑의 시를 읊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지켜보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키클롭스의 눈은 행복하고 슬픕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그 바라보는 방향이 같지 않음이 깊이 슬픕니다.
어느 날, 키클롭스는 꽃밭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는 둘을 발견합니다. 그의 발아래엔 질투심만이 들을 수 있는 육중한 바위가 있었고 그는 연적을 향해 바위를 던졌습니다. 바위를 던져, 빠져나가는 ‘사랑’을 손에 꼭 움켜쥐려 했습니다. 아키스는 피하지 못했습니다. 바다의 님프였던 갈라테이아는 숨을 헐떡이는 연인 아키스를 강으로 변신시켰습니다. 시칠리아를 흐르는 아키스 강은 강과 바다가 만나 물살이 세다고 합니다. 못다 한 사랑이라 더 센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제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후우~'하고 입김을 불면 드러나는 차창의 낙서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은 잊고 지내다 과거 어느 날의 흔적처럼 문득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이터를 가면 그 오래전 사랑이 까르르 웃습니다.
언제였던가요? 운동화가 비에 젖을까 봐 비닐에 씌우고 맨발로 놀이터를 뛰어다녔습니다. 그런 절 보고 냉큼 업히라며 돌려대던 그의 등은 우산보다 넓었습니다. 비 내리는 놀이터에서 키클롭스를 떠올립니다. 바위를 던진 키클롭스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끝내 갈라테이아는 키클롭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키클롭스의 바위는 ‘손에 꼭 쥔 것은 네 것이 아니'라고, 손바닥을 펴도 남아있는 것만이 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눈처럼 행복하고 슬픈 불빛 아래, 놀이터는 여전히 비를 맞고 있습니다.
놀이터
놀이터에
비가 왔다
비의 무게를 저울질한
시소는
정직하게
왼쪽으로 기울었고
물방울 크기의 기억들은
아슬한 미끄럼틀 위에서
일제히 미끄러졌다
바람은
그네에
간신히 젖은 엉덩이를 걸치고
방법을 찾지 못한
인연은
뺑뺑이 위에서
내릴 정거장을
묻고 있다
추억과 나 사이로
폐타이어와 구름사다리가 놓인
놀이터에
태곳적부터 달려온
비가
고르고 평등하게
내린다
등을 켠
저녁은
살그머니
놀이터 밖으로 물러나
혼자 돌고 있는 사랑을
안쓰러이
물들였다
놀이터에
가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