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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노라 Nov 06. 2023

빼빼로와 포도주가 있는 겨울

상상농담 31. 피터르 브뤼헐 <성 마르틴 축일의 포도주>

  곧 겨울이 도착합니다. 겨울 찬바람은 자연의 뼈다귀를 드러나게 하지요. 냉정하고 정확하게 봄 여름 가을동안 불어난 살집을 떨어뜨립니다. 비워진 공간에 덜그덕 거리는 뼈마디를 맞추다 보면 비로소 자연의 몸통을 보게 되지요. 때로 자비 없는 삶의 고통이 인간 정신이 담긴 저수지를 마르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닥이 드러나면 곧 저수지의 넓이와 깊이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지요. 그렇듯 자연의 몸통은 무량한 우주 속 인간의 위치를 깨닫게도 합니다. 


  인간 세상의 측량기사였던 피터르 브뤼헐(1527~1569)이 붓을 잡던 시대는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브뤼헐이 태어나기 조금 전인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말을 타고 작센의 바르트부르크 성을 향해 달렸습니다. 습한 안개에도 멈추지 않았지요. 성에 도착한 그는 수도사만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모두가 읽을 수 있었고 '만인은 사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론리플래닛 하나만 들고 하나님을 찾아가던 가톨릭 세계에 Just go 시리즈도 있고 Enjoy 시리즈도 있다고 알려준 것이지요. 게다가 '론리플래닛' 군데군데 잘못된 안내가 되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이후 서유럽은 하나님께 가는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고집하느라 다시는 보지 않을 얼굴을 하고 유머도 없이 꾸준하고 진지하게 싸웠습니다. 길 위에는 다리 잘린 이, 팔 없는 이, 앞 못 보는 이가 사방을 헤매었고, 숲이 타는 냇내 속에 피냄새가 배어들었습니다. 붓 하나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비처럼 날게 하고, 은혜가 폭포처럼 쏟아지게 하던 화가들은 화구를 챙겨 들고 싸움터를 떠나 저지대인 플랑드르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피터르 브뤼헐은 그 플랑드르 지역인 네덜란드에서 <성 마르틴 축일의 포도주, 1565~1568>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



피터르 브뤼헐 <성 마르틴 축일의 포도주, 1565~1568>


  가로로 긴 화면엔 어둑발이 두텁습니다. 혼란한 세상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하네요. 게다가 몹시 시끄럽군요. 불콰하게 취기 어린 얼굴로 내지르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붉고 커다란 포도주 통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있습니다. 포도주를 받으려는 사람, 얼굴까지 파묻고 정신없이 마시는 사람, 다른 이에게 따르는 사람, 포도주를 쏟았는지 서로 주먹질하는 사람, 아이를 안고 먹이는 여인, 포도주를 억병으로 마셔 이미 기절한 사람 등등 90여 명에 이르는 인물들이 각기 다양한 동작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낡은 책 속 적바림처럼 왼쪽 위 수평선, 성(城) 기슭의 열린 공간에 한 무리의 인물들을 점점이 뿌렸습니다. 오른쪽 뒤편 집과 골목 사이에는 푸른 옷의 말 탄 기수가 지나갑니다. 다락 창문엔 네 명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엔 백마를 탄 기사가 칼을 들어 옷을 자르고 있습니다. 그 앞엔 속옷 한 장이 전부인 허름한 남자가 보입니다. 빈틈을 주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구조를 짜 놓았나요? 온통 수수께끼입니다.  




  이제 수수께끼를 풀어볼까요? 이 그림에서 백마를 타고 붉은 옷을 자르는 기사는 성 마르틴입니다. 성 마르틴은 4세기 경 지금의 헝가리에서 태어나 프랑스 지역에서 살았고 어린 나이에 로마의 군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말을 타고 가던 그는 헐벗은 차림에 구걸하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에겐 추운 겨울이었지만 거지에겐 춥고 불행한 겨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망토를 잘라 거지의 어깨에 둘러주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대 덕분에 추위를 면하였다. 고맙구나."  


  그는 더 이상 죽음의 칼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는 군복을 벗고 사제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홀로 고독하게 주님과 대화했습니다. 그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투르 지역의 주교가 되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피해 거위 우리에 숨었지만 주님은 우리를 무너뜨려 그가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는 주어진 지위에 합당한 신앙과 인품을 갖기를 기도했습니다. 겸손하고 정직한 그의 신심(神心)은 신앙공동체를 성장시켰고 그의 시간은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는데 바쳐졌습니다. 나중 그를 흠모하는 이들에 의해 그의 망토를(cappa) 지키는 교회가 세워졌고 이 교회에 사제(cappellanu)를 두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채플(chapel)'은 이렇게 시작된 작은 교회를 이르는 말이지요.


  피터르 브뤼헐은 측량기사의 꼼꼼함으로 자신이 보았던 축일을 그렸습니다. 망원경과 평판측량과 세오돌라이트(DT)를 사용해 술 마시고 소리 지르고 싸우는 사람들을 재고 달아 구도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빛바랜 십자가는 놓을 곳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왼쪽 귀퉁이에 허름하게 서 있습니다. 성 마르틴은 오른쪽 작은 둔덕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마르틴의 말발굽은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외에는 그를 기억하지 못하겠군요. 우리에겐 빼빼로 데이로 알려진 11월 11일은 그의 장례일입니다. 유럽에서 '성 마르틴 축일'이자 '마틴마스(Martinmas)'라고 불립니다. 


  아, 사랑의 언어와 유행의 꽃다발 사이로 겨울이 옵니다. 포도주 한 잔 더 마시겠다는 욕심에 취하고, 내가 주교가 되어야 한다는 집착으로 소란한 제 속을 들여다봅니다. 마르틴이 내어준 망토로 헐벗고 궁색한 제 어깨를 감쌉니다. 어깨는 시리지 않는데 내면의 저수지가 말라갑니다. 피터르 브뤼헐이 장비를 들고 넓이와 깊이를 재러 올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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