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완벽히 끝낸, 과거의 어떤 기록
외롭다. 이 한 마디로 요즘의 내 상태를 정의할 수 있다. 사무치게 외롭다. 이제는 누군가가 엄청나게 그립지도 않은 것 같다. ‘보고 싶다’라는 말을 하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보고 싶은 것일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예전에는 보고 싶으면 몇 시간이 걸리든 무작정 찾아가서 얼굴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날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마음이 들면 먼저 망설이기 시작한다. 왕복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가서 그를 얼마나 볼 수 있는지, 과연 그가 흔쾌히 응할지, 바쁠 텐데 괜히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내 일은 얼마나 쌓여있고 몸 상태는 어떤지 이것저것 재보게 되었다. 재는 건 사랑이 아니라던데, 우리는 사랑인데 사랑이 아닌 것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8년이라는 시간은 상대적으로도, 절대적으로도 긴 시간이지만, 여전히 사랑한다. 상대도 마찬가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서로의 상황이 급박해졌을 뿐이다. 비생산적인, 당장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일만 꾸준히 이어가는 나도, 눈앞의 까다로운 시험에 스트레스받는 그도 자신의 상황이 더 중요해졌을 뿐이다. 서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을 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전하고 외로운지. 분명 그도 이런 상태일 게 뻔하니 피차 말도 못 꺼내고 서로 보고 싶다는 말만 주고받는다. 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지만 보러 갈 엄두는 내지 않고, 시간을 맞춰보려 해도 쉽지가 않다. 8년 차,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의 사랑이다.
하루가 멀다고 온갖 핑곗거리를 만들어 내 만나던 우리는, 하루에 짧은 전화 한 통도 주고받기도 힘들어졌다. 그의 생활패턴과 내 생활패턴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이 잦아진 요즘의 내 컨디션이 지하 4층 정도에 머물고 있음을 알고 있는 그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를 최대한 웃게 해주려고 없는 애교까지 쥐어짜서 건네는 나니까. 굳이 눈으로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듣더라도, 아니 정말 첫 숨소리만 들어도 어떤 상태인지 서로 속속들이 꿰뚫는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평소보다 좀 더 보고 싶다고 말하고, 몸 상태를 걱정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역설적이지만 배려와 동시에 본인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챙겼다.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연락하기 힘들면 힘들다고 말했으며 누구 한 명이 보자고 했을 때 오늘은 힘들다고 거절했다. 결국 둘 다 외로운 상태로 남게 되는 이상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도 나만큼 외로울 것이라는 걸,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안다. 어느 날 주고받았던 5분가량의 짧은 전화 중 그는 ‘어젯밤 갑자기 잠이 확 깼는데, 숨을 못 쉴 정도의 답답함이 느껴져서 방문이고 창문이고 다 열고 잤어’라는 말을 했다. 요즘 입에 필터 따위 끼지 않고 사는 나는 즉각적으로 ‘그거 공황장애 초기 증상인데’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 놀랐는지, ‘공황장애? 내가 아는 그 공황장애?’라며 퍽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건 단지 초기 증상일 뿐이라고, 심하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면서 귀신이든 사람이든 누군가가 날 죽이러 올 것만 같은 위협감 같은 게 느껴지니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짧은 침묵 끝에 그는 ‘너는 이미 겪었던 거구나.’라고 말했고 나는 ‘옛날 일이야. 요즘은 괜찮아.’라고 답했다. 서로 힘들었겠다 따위의 말은 건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서로가 힘든 걸 우리는 알고 있었으니까. 서로를 위로해 줄 힘은커녕 자신을 다독일 힘도 부족했으니까. 그래서 서운하면서도 미안하고, 사랑한다. 아니, 사랑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참 다양하게도 분류했다. 아마 이전까지 우리의 사랑은 에로스(Eros)적 사랑이었을 테다. 특정 상대에게 환희에 차오른 상태로 열정적인 마음을 전하는, 로맨틱하면서도 성적인 무드를 모두 갖춘 그야말로 쾌락 포텐이 가득 터지는 그런 사랑 말이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 굳이 꼽아보자면 아가페(Agape)적 사랑이 아닐까.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랑. 자신의 마음을 열정보다 의무로 인지하는 정신적인 사랑 말이다. 이 사랑을 하는 일부 사람은 ‘상대가 내 우선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들면 다른 상대를 찾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내가 될까 봐, 그가 이렇게 변하게 될까 봐 두려운데도 묘하게 침착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냥 좀 더 성숙해진 것뿐이겠지. 그런 거겠지.
이렇게 사무치는 외로움은 세상의 온갖 밝은 것들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을 때 빛의 잔상이 짙은 곤색 배경에 머무는 것처럼, 땀을 식히려 켜 둔 선풍기에서 어느 순간 서늘함을 느꼈을 때처럼, 사각거리는 필기감을 자랑하던 연필이 갑자기 툭 하고 부러져버리는 그 순간처럼 예상치 못한 시점에 찾아온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인간은 당황할 수밖에 없고, 결국 ‘사랑하고 있긴 한 걸까’라는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가 지나도 우리의 사랑은 온전하지 못할 테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맞추는 건 한계가 있고, 서로의 길은 이미 완벽하게 갈라졌으며 관심사도 일도 다르니 공감대도 멀어질 테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겠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결국 깨닫게 된 것은 ‘나를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 무언의 존재는 없다’는 사실 뿐. 늘 그 자리를 지켜 줄 것만 같았던 누군가도 언젠가 충분히 떠나갈 여지가 있음을, 내게 타인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음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달까. 그것이 가족이든, 친구든, 애인이든 간에 말이다. 이들의 존재나 의미를 부정한다기보다는 나를 오롯이 마주하고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누차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각자의 우선순위에 자신보다 서로를 올리게 될 날이 다시 찾아올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그 상태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그나마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본 글은 <다붓한 공간>에서 진행했던 6월 연재 원고 중 한 편을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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