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goes on

by 박 혜리


수술 후 주치의가 내게 물어보지 않고 다른 약들과 함께 처방한 신경안정제는 처음에는 금방 잠이 들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성이 생겼는지 잠들기도 어렵고 잠든 후에도 금방 깨어났다.


약과 주사가 내 몸에 축적될수록 나는 불면증이 생겼는데 수면 효과도 옅어진 약을 참으려다 아침이 밝아오는 이른 새벽에 입에 털어 넣기라도 하면 마치 허깨비가 된 듯 몽롱해져서 창 밖을 응시하고 있으면 뛰어내리라고 가끔 내게 유혹하였다. 요술을 부리는 이 약을 끊느라 오랜 시간 나는 고생하였다.


대학의 꿈을 동생에게 양보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신랑에게 내 뜻을 전하였고 신랑은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첫째가 유치원에 다니게 됐을 때 나는 대학을 가고 싶다고 했는데 신랑은 둘째를 가질 뜻을 굽히지 않아 막내가 여섯 살이 될 무렵에야 그 문을 두드릴 수 있었고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오고 배움에 대한 설레임에 부풀어 있던 나는 학교 대신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암은 내 미래의 계획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가게에서 만들어진 반찬을 사 먹어 본 적 없는 나는 며칠 동안 몇 가지 반찬을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피로감을 많이 느낀 나는 자꾸 눕고 싶었고 운동을 하기 위해 찾아간 헬스장 샤워실 거울에 비친 내 가슴 한쪽은 자세히 보니 알 듯 말 듯 함몰되어 있었다. 며칠 후 나는 집에서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전신마취를 한 후 조직검사를 하고 깨어나 병실을 가기 위해 간호사와 남편이 미는 병원 간이침대에 누워서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별거 없지?"라고 병실에 가서 말해줄게 하는 표정은 어두웠고 불안한 마음이 든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남편을 바라보는데 입에서는 암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마치 농담이라도 들은 듯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큰 병원에서 다시 내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수술을 앞두고 영상물과 결과지를 복사해서 대학병원을 찾았는데 병원에서는 같은 결과로 나에게 재확인시켜주었다. 그제야 나는 인정해야 했는데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남편은 뭐라고 하는데 블랙홀에 빠진 듯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달리는 차 앞 유리창은 안개가 내려앉은 듯 부옇다.


우리는 그렇게 조우했고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향에 우리 집을 가진 이후 노력하면 화목하고 행복한 내일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던 시절보다 많이 풍족해지고 상황이 좋아졌는데도 여전히 아우성인 것을 보고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특례를 마친 이후로 취업 유목민이 된 남동생과 올 때마다 근심을 안고 오는 여동생 친어머니를 여읜 여덟 살 나이에 머물러 있는 듯 엄마는 내게 손을 내밀고는 어린아이처럼 보채었다. 일이 많을수록 남편은 퇴근시간이 늦어 홀로 육아 중인데 시댁엔 자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이가 둘인 나는 여러 명의 자식을 키우는 듯 바빴고 챙겨야 할 일이 많았다.


그때서야 뜨거운 태양 아래 먼지 나는 황톳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내가 보였다.


임파선의 전이 여부를 알기 위해 다시 전신 마취를 하고 두 번째 수술대에 누운 한 달 후에 나는 첫 번째 항암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치의는 몇 차례의 항암을 해야 한다고 처음 입을 열었는데 수술할 때도 울지 않은 나는 머리가 빠지고 내 몸의 세포들이 파괴된 모습을 상상하며 내가 과연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그날은 병실에서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 울었는데 울기 시작하면 마음이 무너져 더 이상 치료를 받을 수 없으리라 생각해서 다음날부터는 절대 울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여동생은 어린아이들도 머리를 밀고 견딘다며 언니는 어른이니 좀 더 낫지 않겠냐고 말하였지만 그 말은 전혀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두려운 마음으로 맞은 첫 번째 항암은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두 번째부터는 견디기가 한결 수월하였다.


남편은 약물을 받을 때에 병원에 데려다주고 퇴원할 때 나를 데리러 왔는데 입원 확인을 위하여 간호실에 확인서를 작성하려 간 사이에 커튼을 치고 환복을 할 때면 아이들 생각에 나는 고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고 남편이 오기 전에 얼른 훔쳤다.


약물 효과가 좋은지 일주일째가 되면 백혈구는 여지없이 떨어져 나는 다시 입원을 해야 했고 호중구가 감소할수록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며 입맛을 잃었다.


주삿바늘을 꽂은 손을 조심하느라 했는데도 자면서 몸을 옆으로 뒤척이다 그랬는지 아침에 눈을 뜰 때면 가끔 수액과 해열제 아래 이어진 연결 줄 고리 틈새로 삐어져 나온 액체는 바닥에 흥건하고 오한을 덜기 위해 등 아래에 깐 네모난 전기 팩은 손등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호중구를 올리기 위해 나는 주사를 맞고 수혈을 받았다.


입원을 할수록 내 팔은 멍이 늘었고 호중구 수치를 점검하기 위해 아침마다 채혈을 하러 온 간호사는 손등에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어 내 발등에 주사기를 꽂고 피를 뽑았다. 바늘을 찌르고 피를 뽑을 때마다 통증은 객관적인 사실이고 고통은 느끼지 않으면 된다고 난 혼자 주문을 외운다.


항암을 할 때마다 백혈구가 떨어져 입퇴원을 반복해야 하는 나는 아이들 걱정으로 늘 마음을 졸였다.


수술 후 한 달 동안 살림을 도맡은 올케는 유치원에 다니는 조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하여 엄마를 집에 오시게 했는데 도우미가 해놓은 음식을 식탁에 차리지 못하여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은 아빠를 기다려야 했다.


내가 사경을 헤매어도 뭐가 좋으신지 밥을 먹을 때마다 쉴 새 없이 웃어서 밥풀이 사방에 튀어 한상에 먹기가 어려웠던 엄마는 병원을 다녀온 날 도우미 아주머니가 마늘을 좀 까달라는 말에 삐지셔서 집에 돌아간다고 하여 나는 약물로 어지러운 머리를 들어 웃게 하려고 니나노 춤을 추었다.


다인실에서 대기한 어느 날 저녁시간이 지나 병실 밖을 돌며 걷는 내 귀에 울음소리가 들린다. 내 방 맞은편에 입원 중인 할머니께서 운명하셨는지 구슬프게 우는 소리는 내 마음까지 물들였는데 감염 때문에 일인실에 가야 하는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방에 들어가지 않길 빌었지만 간호사는 내 이름을 부르며 그 방이 비었다고 알린다. 나는 방금 누군가 세상을 떠난 자리에 들어가길 꺼렸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하며 잠시나마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빌고 나니 다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들 때문에 남편은 돌아가고 혼자 방에 남은 나는 주사를 맞고 밤 새 골수를 뽑느라 허리를 펴지 못했다.


호중구가 오르고 열이 내린 날 퇴근하고 병원을 찾은 남편 다리를 베고 휴게실에 누웠는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은 한마디 하신다. "새댁, 나이도 젊은데 건강관리 잘해야 한다."라고. 듣고 있는 나는 괜시리 콧등이 시큰해진다. 저녁을 먹고 병원 복도를 걸을 때 휴게실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레지던트 선생을 보면서 피곤하면 침대에 바로 누울 수 있는 내가 낫네 하며 난 입꼬리를 올리고 씩 웃는다.


모든 치료가 끝나고 재발을 막기 위하여 약을 복용하고 4주마다 주사를 맞으러 나는 병원을 다녔다. 호르몬 억제를 위한 그 한알은 첫날은 입덧을 하듯 메스꺼움으로 먹은 음식을 다 토해 내었는데 약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는 나는 곧 적응하였다.


방사선 치료가 끝나자 이 숙제는 내가 끝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동행 없이 오랫동안 혼자 병원을 다녔는데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하며 여행을 한다는 마음으로 다니다 보니 완치 판정을 받았다.


표준치료를 마치고도 병원을 오래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고 어떤 가이드가 없어 막막했었는데 나름의 규칙을 세우고 정보를 얻어서 취사선택하는 어려운 과정을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지혜로워지고 내면은 더 단단해졌다.


병을 얻기 전에는 가까운 내 주위에 머물렀던 나의 시선은 병원에서 마주친 많은 아픈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에는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이 경험은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의 나침반이 되었다.


혼자 병실에 남은 나에게 밤늦게 회진을 와서 안부를 물어주신 주치의 선생님, 면역이 떨어져 간이 된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나는 저 멀리 각 병실마다 도는 밥차의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토가 올라오는데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겠냐고 묻는 간호사에게 시원한 미역국 한 그릇 먹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직접 구내식당에 부탁하여 맛있는 미역국을 끓여 들고 와서 나를 감동시킨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늘 잊지 않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표준치료를 끝내고도 다시 출발선에 서서 무얼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했던 그때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우리는 사이좋게 지내려고 노력 중이다.


치료의 후유증으로 나의 체력은 예전만 못하고 임파선을 제거하여 나는 때때로 어깨 통증에 시달리지만 잃은 것이 있다면 얻는 것이 있다는 평범한 이치처럼 내 삶은 전보다 더 풍부해지고 농밀해졌다.


"암에 걸리니 대학에 새로 간 것 같아. 쓸 데 있는 거 없는 거 구분하게 되고, 생활을 깨끗하게 정리해 창작에 몰두하게 되고, 더욱 진수만을 향해 살도록 단련하는 것 같다 할까. "

--- 화가 김점선


너털웃음이 많아진 요즘 암은 내게 "앎"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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