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처음 파라다이스

by 박 혜리


엄마의 허리 수술 일 년 전 따르릉하고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하며 받으니 엄마다. 일이 없으면 전화를 잘하지 않는 엄마가 전화를 한 걸 보면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아 나는 머쓱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머뭇하시며 아버지 산소 살 돈을 빌려 줄 수 없냐며 나중에 소를 팔아서 갚을 거라고 하셨다. 갑자기 병환이 난 아버지로 인해 비워둔 집에 볼일이 있어 잠깐 다니러 온 사이에 받은 전화였는데 남편의 퇴직금을 중산 정산하여 은행에 다녔던 시매부의 명퇴로 가게를 차릴 돈을 빌려달라는 시누이와 엄마에게 나눠서 드렸다. 아버지 장례식을 치른 후에 엄마 전 재산인 소는 팔아서 허리 수술비에 보태고 모자란 것은 내 비상금을 털어서 수술을 시켜드렸다.


내 나이 열 살이 되기 전, 엄마 옆에 우리 삼 형제가 나란히 누웠을 때 엄마는 내게 동생을 한 명 더 낳아도 되겠냐며 물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말을 이해하였는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는데 얼굴이 예쁜 이웃집 언니가 일찍 도시로 나가 돈을 많이 벌어서 땅을 사 주었다는 말을 하며 엄마 없이도 동생들을 잘 돌볼 수 있냐며 종종 내게 물었다. 당시에 백만 원이면 큰 땅을 살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는 우리 가족이 헤어지지 않고 다 함께 모여 살려면 돈을 많이 벌어서 땅을 사고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엄마의 잔소리를 자양분 삼아 나는 내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전의를 불태웠다.


시간이 흘러 처음 시골에 집을 지었을 때 나의 미래는 온통 장밋빛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일이 생길 때마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하였고 남편과 함께 일을 하며 정착을 하기를 원하였지만 남동생은 불만을 쏟으며 다시 이직을 하였다.

여동생은 만날 때마다 도시락을 들고 다니며 말리지 않았다며 스스로 한 결혼을 원망하였는데 먹고 입지 않고 온갖 고생을 하며 모은 돈으로 지은 집을 왜 지었냐며 엄마는 다시 불평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연세에 산으로 땔감을 모으러 다니실 거냐고 말하려다 나는 참아야 했는데 그 무렵, 피곤하여 병원을 찾아 받은 건강검진에서 병이 발견되어 나는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처음 수술을 받고 누운 병원의 간이침대에서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날, 창밖에는 봄이 오렸는지 헐벗은 나뭇가지에 연둣빛 새싹이 움트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결에 몸을 흔드는 나무를 바라보며 앞으로 받게 될 치료에 대한 걱정보다 마치 것이 것처럼 안도감이 들며 나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평온하였는데 새로 지은 병원의 하얀색 벽에 몸을 기댄 나에게 그곳은 내 생애 처음 파라다이스였다.


다시 입원하려면 많이 대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주치의의 권고에 의하여 수술 후 나는 한 달 동안 병원에 머물렀다. 일을 하러 가야 하는 남편이 불러다 준 그녀는 곧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는데 입원기간에 나의 간병을 맡은 아담한 체격의 그녀는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심장 수술을 받은 남편을 대신하여 가족을 부양 중이었다. 나는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고 혼자 걸을 수 있는 까다롭지 않은 수월한 환자에 속하였는데 그녀는 식사를 할 때가 되면 식판을 가져다주고 내가 밥을 먹으면 그것을 바깥으로 내어놓아 내가 첫 항암을 할 때까지 그 일을 도맡았다. 앞가슴에 캐모를 심고 항상 뭔가를 달고 있어 팔이 부자유한 나를 대신하여 몸을 씻겨주는 것 또한 그녀의 일이었는데 식사 후에 우리는 병원의 복도를 걸으며 산책을 하였다. 남편의 심장에 스텐트를 박은 후부터 간병인 생활을 하였다는 그녀는 환자들의 얘기를 내게 가끔 들려주었는데 환자 같지 않다며 지금까지 봐온 사람 중에 가장 긍정적인 것 같다며 말하기도 하였다. 첫 항암을 하고 나서 한 달 만에 퇴원을 하여 집에 며칠 있다가 내가 재입원하면 그녀는 다시 내 곁으로 왔는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병원생활에 나름 요령이 생기자 세 번째 항암부터는 간병인을 부르지 않았고 백혈구가 제로까지 떨어져 운신을 하기 어려울 때면 이따금씩 그녀는 내게로 왔다. 나는 여덟 번의 항암을 마친 후에 다시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는데 남편이 병원에 데려다주며 운전을 해 준 덕분으로 서른세 번의 방사선 치료 또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표준치료를 끝낸 후에 호르몬 치료를 받게 되면서 4주마다 병원을 오가며 2년을 보냈다. 그 이후 세 달에 한 번 꼬박 오 년을 병원을 다녔는데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추적관찰을 겸한 정기점진 외에 받는 치료 없이 나는 오랜 병원생활을 마무리하였다. 병원을 오가면서 만난 그녀들, 내 힘으로 자녀를 키운 것보다 하나님이 키우는 것이 더 바르고 성실하게 크더라고 말하며 내게 성경책을 선물한 언니, 다른 병명을 가지고 먼저 치료를 끝낸 남편과 함께 재발한 병으로 입원한 언니는 아이들 생각에 가끔 눈물짓는 내게 모든 일은 다 지나가게 마련이라 말하며 시간은 금방 흐른다며 병실 청소를 도맡은 언니의 남편이 희망적인 말을 들려주었는데 사업을 하다 병을 얻은 언니는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짧은 생 얼마나 산다고 하며 음식을 가리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어느덧 오 년이 시간이 지나고 십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한 그녀들과의 추억은 차곡차곡 내 기억 속 서랍 안에 박제가 되었다.




나를 볼 때마다 불만이 가득하였던 엄마는 나의 병원생활 이후에도 볼멘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예전의 엄마처럼 얼마 전까지 남동생은 힘들다며 넋두리를 하였는데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자상한 아버지로 남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이라 일갈하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남편이 출근을 하고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난 어느 날, 무중력 속 공기처럼 창문을 넘어온 햇살에 비친 먼지 한 톨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고요한 시간과 마주한 나는 마치 거대한 우주와 내가 일체가 된 듯 신비로움에 빠져들었는데 병원을 드나들며 입원을 하였던 그때를 가끔 떠올리면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