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엄마 때문에 장남은 따돌림을 당하게 될거야

여섯 번째 상담 1

by 발전소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상담이 원래 이렇게 나만 말하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의사는 나에게 모든 걸 맡겼기 때문에 매번 에피소드를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이야깃거리가 없다가도 꼬박꼬박 한 시간을 채웠고 가끔은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기도 했다.


어떨 땐 실컷 이야기하다가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상담을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도 '내가 필요할 때까지'라는 모호한 대답만 돌아왔다. 명확하고 분명한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좀 답답한 구석이 있는 것이 상담치료였다.


나는 의사에게 차라리 누가 지시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만약 선생님이 엄마와 싸우라면 싸울 것이고 그냥 참고 살라면 살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했다. 의사는 웃으면서 그건 내가 선택할 문제고 이 치료는 내가 편안해 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므로 어느 쪽이든 내가 편한 것이 정답이라고도 했다.


역시 상담은 모호하다.




지난번 상담에서 딸과 남편 이야기를 하느라 빠뜨린 아버지의 칠순 모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임 하루 전, 이번에도 엄마는 무김치를 담갔다며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심드렁한 말투로 그러려니 하며 받고 있었는데 순간 심술궂은 마음이 생겼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걸 말하면 과연 해줄까?


엄마에게 사실은 배추김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엄마는 마침 김칫소가 남았다며 지금 배추를 사다가 담가주겠다고 한다. 재료가 남아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나만을 위해서 배추김치를 한 통 만들어주었고 나는 희망의 증거를 본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 그동안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본 경향이 있지.


엄마는 나한테 잘하고 있는데 내가 좀 예민한 면이 있어서 엄마를 한쪽으로 몰아세웠음을 인정하고 싶어 졌다.


그러나 친정집 근처 중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케이크를 자르기 위해 집으로 갔을 때 나는 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촛불을 끄고 꼬마가 된 조카들 재롱을 잠시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을 때였다. 딸아이가 엄마 방에서 새로 산 멀티탭을 보고 신제품인 것 같다며 지나가는 말을 건넸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걸 사셨냐며. 엄마는 손녀딸에게 "이거 우리 아들이 사준 거야~" 라며 자랑을 해댔다.


나는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해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엄마가 장남을 사랑하는 마음에 의기양양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손녀딸한테 본인 아들 자랑을 하다니. 내 상식으로는 '삼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야 했다.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지 못했더라도 손녀딸에게 아들 자랑을 하는 건 남이라도 꼴불견이라고 했을 것이다.


순간 김치통을 발로 차 버리고 싶었다.


이깟 김치 한통으로 엄마를 용서하려고 했다니.


엄마는 자꾸 결정적인 순간을 나에게 들킨다. 어쩌면 내 눈에만 보이는 걸 수도 있지만 역시 엄마는 장남에 대한 애정이 뚝뚝 흐른다. 내심 장남이 가까이 살기 시작하면서 본인을 살뜰히 챙기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며 언뜻언뜻 내비치는 감정엔 한 치의 계산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계산을 좋아하는 엄마가 이제는 장남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버린 것 같다. 평소 우리 삼남매가 우애 있게 지내길 바라는 엄마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엄마 때문에 장남은 따돌림을 당하게 될 거야!





나는 엄마의 아들 자랑을 들을 때면 격분하게 된다. 몇 달 전 직장을 잠시 쉬게 되면서 엄마와 둘이서 함께 여행을 갔다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장남의 칭찬에 나는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엄마 눈엔 큰아들 밖에 안보이냐고.


엄마는 나도 자식이라는 걸 잊은듯했다.


그동안 여행을 좋아하는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다닌 자식은 정작 나 밖에 없는데도 나에게 아들 자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다.


다시는 엄마와 여행을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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