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엄마에 대한 원망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고 변화시켜왔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내 치료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물어봤다며 남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받은 것 같으냐 했다.
당연했다. 이미 결혼 자체가 엄마로부터의 도피로,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 당시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엄마가 나를 또 다른 보호자로 생각한 남편에게 넘겼을 때 해방감을 만끽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결혼에 골인하고 나서 우리 둘은 철저히 다른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다. 결혼 후 남편은 회사에만 매달렸고 그로 인해 수없이 다퉜지만 생각해 보면 남편을 나무랄 건 없었다. 결혼 전 남편의 목표는 결혼이었고 목표를 이뤘으므로 승진이라는 다음 목표를 향해 달려간 것뿐이다. 나 또한 엄마로부터 돈이 중요하다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에 가정에 소홀한 남편은 대의(돈)를 위해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성공에 대한 야망이 그렇게 큰 줄 몰랐던 건 불찰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이라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으니 불찰 투성이었다. 시부모님 모두 교사인 나름 교육자 집안인 데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으로 보였지만 뼛속까지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경상도 특유의 문화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당황하게 했다.
남편은 갈수록 승진을 위해 집에서 먼 도서벽지로만 돌았던 시아버지를 닮아갔다. 시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빨리 교장을 달고 싶어서 가산점이 높은 외진 곳에서만 근무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집에는 아내와 아들들과 어머니를 남겨 둔 채. 덕분에 동기들 중 빨리 교장을 달았다며 너무나 좋아하시던 모습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순간에 시어머니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평소 밖으로 나돌기 좋아하는 시어머니가 왜 그렇게 됐을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젊은 시절부터 남편 없이 시어머니와 아들 둘을 데리고 실질적으로 가정을 꾸려왔을 시어머니는 남편의 승진으로 자신의 노고가 보상된다고 생각했을까? 정작 본인은 승진을 애초에 단념하고 평교사로 명퇴를 하셨다.
시어머니에게서 나의 미래를 엿봤다면 억지일까?
시어머니의 그런 희생을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집안 분위기와 갈수록 시아버지를 닮아가는 남편 옆에 있던 나는 머지않아 시어머니처럼 살게 될 것 같았다. 늘 아버지에게 눌려 사는 어머니를 불쌍해하면서도 결국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던 남편은 어쩌면 본인도 모르게 나도 시어머니처럼 살길 바랬을 것이다. 그게 익숙했으므로.
수없이 다투고 그때마다 땜질처방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바빴던 우리는 결국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달려왔던 우리는 그것이 성공하자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으니 순탄할 리가 없었다.
남편의 안 좋은 버릇을 고치는 것을 포기하면서부터는 엄마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이 성공에 대한 야망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진 아버지의 부재도 한 몫했을 거라는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 그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빠가 할 일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아이 때문에 정시퇴근을 하는 것조차 눈치를 보고 회사에 집안 사정을 운운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성공과 가정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 아버지가 없었던 남편은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아이의 양육에 왜 아빠가 필요한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결혼을 할 때 집안을 꼭 봐야 한다고 말은 했지만 그걸 겉모습으로만 판단을 해버렸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어려서 몰랐지만 엄마는 이미 결혼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닌가.
도대체 엄마로서 딸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나 화가 났다. 생각해 보면 엄마 때문에 결혼을 일찍 결심해 버린 데다 학창 시절 연애도 제대로 못하게 했으므로 엄마는 나를 남자 보는 눈도 없게 키워버렸다.
내가 내 발등을 찍고 있는 걸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말리지 않은 엄마가 야속했다. 물론 엄마도 몰랐겠지만 본인이 말렸다면 네가 결혼을 안 했겠냐며, 어차피 소용이 없었을 거라고 말을 하는데 힘이 빠졌다.
울고 싶어 졌다. 내 지난 시절이 너무나 후회되었고 결혼은 우주의 충돌이라는데 엄마는 무슨 용기로 어린 내가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걸까.
한동안 온 세상이 싫어지는 느낌을 갖고 살았다.
모든 잘못을 엄마 탓으로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했다. 자식을 먹이고 입히는 것만 신경 쓰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빼먹고 키워버린 엄마가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