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미움 받을 자격

아홉 번째 상담

by 발전소

나는 엄마와의 대화 이후 '허무+안도+슬픔' 세 가지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끼며 지냈다.


지금까지 엄마를 미워하며 지냈던 긴 시간이 이렇게 빨리 무너질 줄은 몰랐다. 내가 아는 엄마는 이렇게 쉽게 인정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허무했다. 내 말을 반박하고 변명하기에 엄마는 벌써 너무 늙어버린걸까?


그러나 이 문제를 터뜨려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꽤 괜찮은 방식으로 엄마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 오로지 나의 의지로 가능했다는 점은 다행스러웠다. 상담을 하면서 꾸준히 나를 관찰하고 기록을 한 것이 결정적인 순간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곧 엄마를 직접 만나 엄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졌다는 것은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내가 더 이상 엄마를 무조건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의사도 이유를 알고 미워하는 것과 이유를 모른 채 미워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며 긍정적인 신호라고 답했다.


내가 엄마에게 느끼는 정서는 이제 안타까움이 되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함께 좋은 아버지를 구경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엄마도 엉뚱한 남자를 남편으로 맞았을 것이다. 결혼 후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불합격이었던 남편을 확인했을 때 엄마는 절망했다.


자라면서 엄마가 결혼을 후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 나는 그때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음을 이야기했으나 엄마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냥 본인의 인생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아이들이었지만 핏줄에 대한 애정마저도 표현할 줄 몰랐던 아버지 밑에서 우리는 행복할리가 만무했다.


나는 지금까지 엄마가 그때 이혼을 했다면 어땠을까 여러 번 상상을 해봤다. 엄마의 걱정대로 우리 셋은 어엿한 사회인이 못 되었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 입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 욕구는 생기기 어려우므로 우린 지금보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으로 편입됐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를 제거할 용기를 냈다면 어땠을까?




의사는 내가 엄마와 대화를 시도했고 그로 인해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 함께 기뻐하면서도 역시 내 마음속에 새롭게 떠오른 문제를 지적했다. 상담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 자체가 별로 없었고 나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던 의사는 의외의 지점에서 원인을 찾게 되었다며 놀라워했다.


나 역시 아버지를 마음속 깊이 묻어놓고 살았음을 깨닫게 되어 새삼 놀랐지만 이상하게도 해결하고 싶지가 않았다. 엄마와는 해결을 원했지만 아버지와는 이마저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아버지를 지워버린 듯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 셋과 엄마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감정조절이 안되고 욕설과 폭언이 심했던 아버지는 피곤에 지친 날이면 우리에게 화풀이를 했다. 어린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당해야만 했고 엄마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서 환멸을 느꼈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엄마는 남편으로서,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미달이었던 남자에게 인생을 맡겨버린 자신을 원망하는 것 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것이다.



나는 '슬픈 기분'이 들었다.


슬프면 슬픈 거지 '슬픈 기분'은 또 무슨 감정일까.


아버지가 마땅한 역할을 못했고 그로 인해 엄마는 아이를 키우는 방식에 과도한 편견이 작용하게 되어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으므로 내 입장에서는 아버지에게 따지기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아버지라는 호칭조차 아깝다고 느껴질 만큼 나는 아버지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없었고 내 인생에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굳이 수고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이런 상황이 당연히 슬퍼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로는 아무 느낌이 없어서 슬픈 기분이 들었다.




의사는 예상치 못한 빠른 전개에 갑자기 떠오른 아버지까지 내가 많이 혼란스러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부분은 오랫동안 갇혀 있던 감정이므로 꺼내어 보고 싶은지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문제라고 했다.


나는 지금으로선 그건 아니라고 답하며 일단 이 상담의 목표는 달성한 것 같아서 다행스럽지만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라고 답했다.


우리는 이 상담을 종결할 시점이 가까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고 앞으로 한 두 번은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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