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기운이 있어서 쉬고 싶었지만 병원으로 향했다. 마지막 상담인 데다 그동안의 패턴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동안 꼬박꼬박 일주일에 한 번씩 면담을 하면서 굳이 안 만나도 될 것 같은 주에도 의사는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그렇게 일정한 간격으로 진행하는 것이 나를 관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는 이제 엄마와의 대화가 편해졌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짜증도 나고 듣기 싫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미움과 원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엄마의 말속에서 편애의 증거를 찾아 헤맸던 내가 떠오르면 엄한데 에너지를 낭비했구나 싶어서 실소가 나기도 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역시 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문제의식 자체가 없으니 해결할 것도 없었다. 이 부분은 여전히 슬픈 지점이다.
곧 복직하게 될 직장에서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걱정이 좀 된다고 말했다. 상담을 하면서 내가 사람을 사귀는 방식이 너무 엄격하다는 것을 느꼈고 이것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것 까지도 알겠는데 막상 현장에 가게 되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처음엔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하겠지만 이제는 본인이 알고 있으니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차츰 자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자각이 반복되면 행동이 수정되기도 하지만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덧붙여 의사는 원래부터 상담의 목적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잘 아는 내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더 나은 인간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대응방식을 편한 쪽으로 바꿔보는 시도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 같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이번 상담치료가 도움이 되었다. 다만 의사의 말처럼 내가 나를 더 잘 알게 되면 실제 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이 해소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만 어차피 내가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차츰 인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대응방식을 바꾸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푸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대신에 가만히 있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노력이 필요한 영역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나를 바꾸고 싶다는 욕심을 놓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따뜻한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증거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대신 불편한 일이 생기면 전처럼 불꽃처럼 타오르지 말고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관찰을 하는 데 집중해 볼 것이다. 그동안 이 불꽃에 너무도 많이 데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불을 피울 만한 일인지 의심해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벌 수 있으니 나는 나에게 너그러운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닌 내가 나를 너그럽게 인식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의사에게 내 치료에 대한 총평을 듣고 싶다고 했다.
의사는 단기간에 뚜렷한 성과를 낸 상담이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혼자서 많은 부분을 해결해 나가는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보통은 상담이 예정보다 훨씬 길어지는 경우도 많고 혼자서 생각하는 것을 어려워할 때는 의사가 화제를 던져주기도 하는데 나의 경우 대부분 혼자 원인을 찾아가고 인과 관계를 탐색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했다.
그만큼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가 강했던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하며 인생의 큰 숙제 하나를 해결한 기분이라고 답했다.
의사는 앞으로 또 어려운 시기가 오겠지만 그때는 이번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될 거라며 내게는 혼자서도 충분히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용기를 주었다. 나는 자아가 강하다는 말이 다시금 나의 빡빡한 인간관계의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역시 앞으로 쉽지만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의사에게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하며 성심껏 내 이야기를 들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상담치료의 많은 부분이 결국 남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만큼 일부러 돈을 내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엄마가 싫다는 여자의 이야기를 공짜로 들어줄 사람은 현실에서 찾기 어려울 것이다. 덕분에 나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당장의 불편함도 해결할 수 있어서 시도해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드라마틱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 내 인생에 이번 경험은 좀 특별한 일로 기억될 것 같다. 막연했던 상담치료라는 것을 실제로 경험해 보고 싶은 호기심은 늘 있었지만 우연히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직접 해보기로 마음먹은 일은 지금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40년을 넘게 살면서 나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정들었던 병원 문을 나서면서 10주간의 특별한 경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사뭇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