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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선 Jul 04. 2023

내 이름을 불러줘

서울퀴어퍼레이드(23.7.1) 참가 후기

"안전 조심하고..." "너 계속 실명으로 활동할 거야? 이제라도 활동명 짓는 게 낫지 않겠어?" "앞으로 글 쓸 때도 실명 안 쓰는 게 낫지 않을까?"


7월 1일 인생 첫 퀴어퍼레이드를 참가하려고 두근두근 준비하고 있던 저에게 친구들이 저마다 건넨 말이다. (여담으로 활동명을 직접 지어주겠다는 친구도 있었는데...... (진)달렉이 어떻겠냐고 했다. 평화 운동을 하겠다는 사람의 활동명으로 온종일 Exterminate/말살시켜라! 만 외쳐대는 달렉이 가당키나 한 건지...... 그저 웃지요.)


기독교에 오래 몸 담아온 친구들이 주변에 많다 보니 걱정도 했으나, 신념과는 별개로 애정을 담아 '안전'에만 초점을 맞추는 발화가 참 고마웠다. 또 한편으로는 퀴어퍼레이드 자체는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라도 이에 대한 혐오세력들의 방해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점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이전 단체에 있을 때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는데, 역시 평화적인 메시지보다는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메시지가 훨씬 쉽게 퍼지는 모양이다.


퀴어퍼레이드에 첫 참가다 보니 홈페이지에서 어떤 것이 있는지 둘러보며 이동했다. 무대와 부스 소개 등 여느 행사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아동, 청소년 참가자분들의 안전], [참여자 분들의 심리적 안전]에 대한 홈페이지의 링크가 눈에 들어왔다. https://www.sqcf.org/sqp2023_guide


그렇지 않아도 안전에 대한 주의를 받고 난 뒤여서 인지 유독 신경이 쓰여 하나하나 정독했다. 아웃팅 방지를 위한 대처 방법, 행사 중과 종료 후에 느낄 수 있는 심리적 고통에 대한 대응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준비한 것이 눈에 띄었다. 평소에도 각종 매뉴얼을 보며,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매뉴얼이 생겼을까에 대해 생각하기를 즐기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다는 것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을지로입구에 도착하니 척 봐도 축제를 즐기러 가는 듯한 사람들이 우르르 한 방향으로 몰려갔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듯한 사람들도 많았고, 다들 익숙한 설렘을 안고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덩달아 나도 긴장이 풀린 채로 이동하여 동료들과 합류하였다. 전날까지 동료들과 깔깔대면서 만든 피켓과 #레전드퀴퍼아이템으로 등극한 무지개 먼지떨이를 들고 한참 즐겁게 사진도 찍었다.

전날 퀴퍼 준비를 하며 만든 피켓들


우리 팀은 좀 늦게 이동을 했다 보니 퍼레이드 차량이 전혀 보이지 않는 행렬의 맨 뒤를 차지하고 걷게 되었다. 주변 여기저기서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앞에서 함성을 지르고 있는 구간이 있어서 두근두근 기대를 하고 갔더니, 반대세력이 스피커까지 설치해 놓고 목이 터져라 온갖 구호를 외치고 있더라. '여러분의 청춘은 고귀합니다',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구호들을.


내 바로 앞에는 아마 한국어를 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분들이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스라이 들리는 구호 끝에 퍼레이드행렬과 함께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영어로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쓰여 있어서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도 현수막을 발견한 직후에는 어리둥절하여 앞선 외국분들과 함께 반대 구호를 이해를 못 한 채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건 아닌지 주변을 한참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구호의 내용이 제대로 들리는 범위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착각을 한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저 혐오를 사랑으로 받아주고 있을 뿐이었던 거다.


자신들의 존재가 죄악이라며 회개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발랄하게 환호성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온갖 감정이 밀려왔다. 내게 하는 말도 아닌데 저렇게 상처를 줄려고 작정한 말들에 내가 다 서러울 정도였는데. 사실 개인적으로 종교상의 신념을 이유로 예배를 불참하겠다고 이를 강요하던 중고등학교와 오랫동안 싸웠던 경험이 있다. 매번 설명하고, 반박하고, 모두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는 그 과정이 정말 힘들었다. 모두 채플을 위해 맨 꼭대기 층의 강당으로 이동하는 동안 홀로 그 흐름을 거슬러서 지하 1층에 있는 도서관으로 한 마리 연어가 된 것처럼 움직이면 반대편에서 이쪽을 향하고 있는 수많은 그 눈동자들이 정말 무서웠다. 갑자기 교실로 찾아온 다른 학년 교사가 내 이름을 호명하며 이단이니 저 아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선언한 경우도 있었다. 사실 반대세력의 고함을 듣다 보니 그때가 갑자기 확 플래시백이라도 하듯 올라왔던 것 같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한 방향으로 걷고, 화를 터뜨리거나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는 말은 나를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듯 웃고 떠들고, 환호성을 지르고 박자에 맞춰서 함성을 터뜨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던 순간인 것 같다.


사실 지난주 내내 활동명을 정하고 브런치도 활동명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한참하고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퀴퍼가 끝난 늦은 밤까지 개인 SNS에 퀴퍼에 대한 언급을 올리는 것도 망설이고 있었다. 개인으로서의 와 활동가로서의 사이에 구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퀴어퍼레이드를 준비하며 만들던 피켓에 다양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프라이드 플래그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방향을 잡아 붙이던 우리 활동가의 모습이나, 반대구호에 맞춰 환호성을 내지르며 울컥했던 그 순간 등을 곰곰이 돌이켜보며 역시 실명을 내걸고 활동을 해나가고 싶다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에 붙은 이름들을 직접 호명받고 싶은 사람들의 편에 서서, 직업으로서의 활동이 아닌 삶으로서의 활동을 즐겁게 해나가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꼭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퀴퍼에 참가한 사람들처럼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도 있는 거지않나. 언젠가 이 일을 그만두더라도 이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언제든 떳떳하게 내 신념을 밝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체로서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과 지지가 되는 경우가 많다. 혹시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분들 중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해보고 싶어진 분이 있다면 내년에는 스스로에게 편안한 복장으로 친구들과 함께 놀러 오세요. (저는 사실 전날까지 뭘 입을지 엄청나게 고민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그 외에도 지지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여러분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2017년부터 함께하고 있는 앨라이 캠페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http://iamally.kr/

(2024.5.15.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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