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돼지의 나날 회고.
하나의 문장으로 이전의 나날들을 아우를 수 있는 말이 필요했다. 비자발적 퇴사를 하고 2주 정도를 아무것도 안(했다고 볼 수는 없고 간신히 생존)하며 말 그대로 버텼다. 인격이 살해된 후에 사람이 어떻게 망가질 수 있는지 단시간에 (다시) 겪은 샘이다.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그와 유사한 상황을 다시 겪거나 그보다 덜 한 스트레스에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는 걸 여실히 실감했다.
2년간 휴직기를 가졌고 그 이전에 프리랜서 기간까지 합치면 5년간 조직생활을 겪지 않았음에도 그것은 단순히 회피와 외면이었지 문제의 중심을 직면한 해결은 아니었다.
마음의 고요는 깨지고 침전물은 쉽사리 부유해 순식간에 흙탕물이 되어버린다.
내가 애써 유지해 온 맑고 긍정적인 정신 상태는 근원적인 해결은 아니었다. 이것을 들여다보는 건 언제쯤 가능할까.
각설.
모든 일에 의미를 찾는 편인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제발 글을 좀 써라. 네 길을 그 길 뿐이다.
목소리가 또 계시처럼 들려오는 것.
무당이 신병이 나서 신을 안 받으면 시름시름 앓듯이 나는 글을 쓰지 않자, 앓기 시작했다.
몸이 아프고 병드는 게 아니라.
생각이 멍해지고 박약해지고 허기가 몰려와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글을 쓸까 싶은 마음은 허기가 되어 치킨을 시켜버리는 것이었다.
일곱 마리의 닭을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나는 내방 한쪽에 마련된 관짝 같은 침대에 누웠다.
찬찬히 되돌아본 하루 동안 자살예방센터에 전화를 걸거나 수건걸이에 걸린 샤워타월을 보며 구체화시켰다는 걸 알게 됐다.
눈물이 땀처럼 눈구멍을 비집고 나온다. 임계치에 다다랐을 때의 표면처럼 또르르.
넘치고 만다.
베갯잇이 적셔질 동안 눈도 뜨지 않고 소리 없이 들썩이면서 누구 제발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줘. 괜찮다고 말해줘. 중얼거린다.
누군가 제발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줘.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숨소리도 없는 공허와 적막 속에 나는 젖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읊조려 본다.
괜찮아. 그래 괜찮아.
다독다독, 다독다독. 나는 명치 언저리를 다독였다.
괜찮아.
그 첫마디에, 그 한마디에 숨이 고르게 쉬어지고 깊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어둡고 음울한 터널을 한참만에 걸어 나왔다.
우리가 나 자신에게 얼마나 냉정한가, 나는 사실 한쪽에 물먹은 양말처럼 썩은 내 나게 13일 동안 내 영혼을 치워두고 거들떠보지 않은 샘이다.
긴긴 괴롭힘이 시작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훨씬 이전부터 방치해 둔 샘이다.
먹고사는 게 쉬운 게 아니야. 네가 나약해서 버티지 못하는 거야. 이러한 말들로 다그치고.
영혼이 갈가리 찢기도록 채찍질하면서.
어쩌면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 데도 말이다.
오늘부터 치킨대신 따뜻한 차 한잔 건네며 글 한편 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