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들의 회색 물결

내 마음의 이상 #5

by 직장인 B
한꽃나무를위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 이상, '꽃나무' -



모든 직장인의 마음속엔 저마다의 꿈이 있다. 그 말인 즉 직장인 중에 꿈을 이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렴.


직장 내 커피타임 담소 중에 가장 재미있는 주제는 퇴사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퇴사의 사유란 그 머릿수만큼 다양하다. 그중엔 꿈을 이루기 위해 혹 꿈을 정말로 이루어서 퇴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가장 흔한 버전으로는 영화 쪽 공부를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류의 이야기가 있다. 최신 버전으로는 암호화폐 투자에 성공해 퇴사를 한 이야기도 있다. 예술 분야로의 진출과 재테크 대박으로 인한 경제적 자립은 직장인 꿈 리스트 꼭대기에 있는 쌍두다. 보다 좋은 조건의 회사로 이직을 한 것이라든가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나 월급 살이를 그만하게 된 건 이 분류에 끼워주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최소한의 콧대다. 꿈을 이룬다는 건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선망, 존경이라는 말이 꿈과는 더 어울린다. 꿈으로의 걸음은 인생을 좀 더 깔끔한 회색빛으로 물들이는 것이 아닌 누구에게도 없는 새로운 색으로 칠하는 도전이다. 그야말로 꽃나무, 꿈을 이룬 직장인은 꽃을 피워 자기만의 색을 얻은 나무와 같다.


꿈을 위해 퇴사한 동료의 이야기를 하는 선배들의 눈은 언제고 들썩인다. 퀘퀘 묵은 수납장 속에 들은 보석처럼 그 존재만으로도 묘한 진동을 자아내는 무엇이 눈 너머에 있다. 한창 모든 일을 대리하는 대리님부터 정년을 코 앞에 둔 어느 부장님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막 가정을 이루었거나 아이가 태어난 선배들 경우에만 간혹 예외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아직은 듣기만 한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는 것도 이유지만 것보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무언가를 내려놓은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꿈을 위해 퇴사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난 엉덩이가 들썩이는데 이 느낌을 지금은 유지하고 싶다. 그래야만 이야기를 듣는 처지를 벗어나 나 또한 어느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남들의 멋진 이야기를 전달하는 건 성에 맞지 않다. 내 꿈은 시인이 되는 거다. 시를 써서 딱 지금의 월급 정도를 받는 삶보다 더 화려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 꿈을 이루었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던 날의 밤엔 평소보다 쉽게 시가 쓰인다. 그 느낌이 좋고도 쓰리다.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집단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고 당연하게 힘차지 않다. 직장의 색은 거북하진 않지만 이끌리지도 않는 색, 회색이다. 삼성의 사무실이 바다처럼 푸르지 않고 엘지의 사무실이 붉게 타오르지 않는다는 걸 우린 안다. 멋지고 아름다운 직장이라도 직접 혓바닥을 대어 보면 다른 곳보다 좀 더 깔끔한 회색깔이 묻어 나올 뿐이다. 직장이란 그런 세계다. 명도만이 있을 뿐 개성은 없다. 동료나 나나 별반 특별할 것이 없어 각자의 물감을 서로에게 칠해도 망하는 쪽이 없다는 것이 직장의 유대감이자 족쇄다. 그렇기에 구구절절한 삶의 이야기가 잔뜩 풀어져도 치명적인 열등감 혹 자만심은 생기지 않는다. 직장인들이 으레 각자만의 꿈을 지니게 되는 건 이러한 무자비한 무미함에 대한 일종의 비토일지도 모르겠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나란히 서 있는 사람들 중에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이 되길 원하는 마음은 다 똑같다. 그 마음이 자아내는 울렁임이 참을 수 없는 걸 넘어 막을 수 없는 것이 될 때 기어코 꿈이 구토되고 그것으로 사회엔 다채로운 꽃들이 피어난다. 그런 걸로 치면 직장인들이란 퍽 속 좋은 사람들이다. 아무렴.


꿈을 이룬 직장인은 없다. 그런데 어쩌면 꿈을 아무도 이루지 못했다는 점보다 모두가 꿈을 꾸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고 무거운 사실일지 모르겠다. 설령 꿈을 가지게 된 이유가 꿈을 이룬 사람이 하나도 없는 칙칙한 직장 생활에 대한 반작용일지라도 말이다. 꿈이라는 건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잉태되었다고 한들 빠짐없이 각자의 소중한 서사를 지닌다. 대게 그것은 취미의 탈을 쓴다. 직장인들의 취미 세계란 어마어마한 넓이를 지니는데 내가 들은 취미만 나열해도 축구, 농구, 야구, 승마, 캠핑, 클라이밍, 독서 모임, 재테크 모임, 스쿠아 다이빙 등 열 개를 그냥 넘는다. 백 개를 넘기는 것도 어렵지 않다. 자신의 팀원들을 개개인이 가진 취미로 구별하는 팀장님도 보았다. 주말 간에, 휴가 간에 이러저러한 취미 활동을 했다는 동료들의 이야기에서 그 어떤 의지적인 몸부림을 발견한 후 나는 그것과 꿈의 연관성을 알아챘다. 자신의 취미를 사랑하는 직장인은 사실 없다. 직장인의 취미란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무언가를 닮은 것에 불과하다. 꿈을 이루려는 노력 대신 꿈을 이룬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다. 그게 취미 활동의 민낯이겠다. 꿈에 대한 선망, 꿈으로의 의지가 취미를 만든다.


이상스러운 흉내가 아닐 수 없다. 차라리 꿈을 위한 진지한 노력을 통해 진짜로 꿈을 이뤄내면 되지 않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이런 말은 굳이 여기서 주목할 필요는 없겠다. 진실로 주목할만한 건 그러한 흉내내기, 반짝임을 잃지 않은 의지가 직장인 한 명 한 명을 보다 특별한 누군가로 만들고 그로써 직장이라는 회색깔의 세계에 아주 묘한 질감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독서 모임을 좋아하는 박 대리님과 클라이밍을 좋아하는 어느 사원에게선 서로 다른 촉각적 감각이 전해진다. 이러한 질감이 '직장'이라는 단어에 '생활'을 붙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통해 직장은 업무 능력으로 줄을 세우면 끝나는 공간이 아닌 서로의 삶을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꿈의 힘이며, 흉내내기의 의의다. 그리하여 이제 직장에 대한 비유를 평평한 회색 지대에서 질감이 깃든 회색 물결로, 더 나아가 회색의 풀이 물결을 이루며 어느 일렁임을 자아내는 초원으로 바꾸고자 한다. 울타리 너머에 존재하는 꽃나무를 따라 움직이며 참으로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는 풀들이다. 참을 수 있되 떨칠 수 없는 풀들의 먹먹한 역동은 무자비하게 무미한 색깔, 회색에 대한 수동적이되 확고한 저항이다. 이 저항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 이런 마무리가 가능하다.


모든 직장인의 마음속엔 저마다의 꿈이 있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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