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추석을 앞두고 준비한 체육대회가 끝이 났다. 진짜 어떻게 그 많은 일을 다 했지 싶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준 것도 기분이 좋았고, 체육대회 내내 사고 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낸 것도 행복한 기억 중에 하나로 남았다. 에너지를 다 쏟아냈다. 이번 행사가 마지막인 것처럼 혼 힘을 다 했다. (사실 여행 중에 이런 일을 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진행을 맡았던 터라 조원이 없던 나는 오히려 모든 조에 어울려서 놀다 보니 결국에 제일 많이 술을 마신 사람이 되어버렸다.
작전 회의(?)를 했던 H5, 일명 '영호네 집'에서 여전히 모였다.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선 별 계획 없이 또다시 천장을 보고 누웠다. 조장과 몇 명의 친구들이 쿠션 꺼진 침대와 시원한 타일 바닥에 명절날 던진 윷가락처럼 널브러져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기도 하고 각자의 조별 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하나, 둘 더 모이면서 우리끼리의 뒤풀이가 되었다.
그런저런 이야기들로 한참을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낮에 스쿠버 다이빙을 하러 나간 친구가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서 한 마디 슬쩍 꺼냈다.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놀러 가요"
"어디?"
" 라스아부갈룸 이요"
라스아부갈룸
여기서 '라스아부갈룸'이란 다합에서 가까운 블루홀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장소로 바다를 통째로 빌려 쓰는 느낌의 캠핑장이라고 하면 이해가 쉽다. 블루홀에서 얼마 멀지도 않고, 먹을 간식, 술과 음료, 물만 챙겨간다면 준비물은 딱히 없다. 대부분 1박 2일의 여정으로 다녀오는 곳이라 가방을 따로 챙길 필요도 없고, 하늘엔 핸드폰 화면보다 화려한 별이 있어, 핸드폰을 보고 있을 필요도 없으니 보조 배터리를 챙길 필요가 없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다합에서 가장 찾기 쉽다고 하는 'H5' 앞에 택시를 불러놓고 짐을 실었다. 멀지 않은 블루홀로 갔고, 각자 비용을 지불하면서 드디어 여행은 시작된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하는 친구들은 나보다 먼저 다합에 온 사람들이다. 어쩌면 모두가 조금씩 더 친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의 팀이라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 했는데, 이번 체육대회를 마치고 나니 나 역시 가족처럼 친해졌다.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이게 가장 신기한 일이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 잠시 머무는 공간에서 인사를 하고 친해질 수 있다는 게 한국에선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여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이런 인연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게 신기했다. 어릴 적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았던 내가 조금씩 변하는 게 여행 덕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말이 나오고 나서 물을 샀고 간식과 술도 준비했다. 짐 들을 배에 싣고 사람들이 올라타자 보트는 우리가 정해둔 목적지로 달렸다. 배들 타고 들어가는 곳이라면 지내기 험하거나 지역적으로 오지라고 생각했지만 도착한 곳은 전혀 예상과 달랐다. 바닥에서 이불도 없이 자는 줄 알았는데. 어엿한 지붕이 있는 숙소도 있고, 바다도 바로 지척에 있는 곳이라 한껏 들뜬 마음으로 배에서 내렸다.
이집트의 대부분 날씨가 건조하고 비가 거의 오지 않는 편이다. 체육대회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소풍을 간다면 비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말이다. 완벽한 날씨 속에서 머무를 곳에 다다르자 너나 할 것 없이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해가 있는 시간에 바다를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모두가 바다에 뛰어 들어갔다.
저녁은 이곳 식당에서 먹는 것으로 주문했으니 저녁이 되는 시간까지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다합 인들의 고유 특성은 이 여행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스쿠버 다이빙이나 프리다이빙을 배웠던 사람들은 물이 익숙하니 바다를 아파트 놀이터처럼 헤엄쳐 다녔다. 물속에 소라나 전복처럼 맛있는 뭔가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다들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들어가 헤엄을 치며 서로의 주변에서 유영했다.
얼마나 헤엄을 쳤을까? 숙소에서 물고기 요리와 닭고기 요리를 주문한 우리는 음식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왔다. 시계는 볼 필요도 없고, 볼 수도 없었다. 그저 음식이 준비되어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쉬었다가 다시 바다에 들어가면 될 일이다. 저녁을 먹으러 올라온 우리는 소금기가 남아 있는 손을 마른 수건에 슥슥 닦아 버리고 젖을 옷을 입은 상태로 숟가락을 들었다.
배가 고픈 상태에서 밥을 먹으면 꿀맛이라고 하던데, 물에서 배가 등가죽에 붙을 때까지 놀아버린 우리는 세상 가장 맛있는 저녁밥을 먹었다. 물놀이 이후에 먹는 저녁은 행복이고, 저녁 상을 물려놓고 마시는 술은 즐거움이었다. 저녁은 지붕이 거의 없다 싶을 정도인 야외였는데, 지붕을 버리는 대신 밤하늘과 시원한 바닷바람을 얻게 되었다, 별 것 없는 안주에서 즐거움은 더해만 갔다.
체육대회를 마치고 나서 그랬을까? 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회사원들의 회식처럼 삼삼오오 모였다가 단체로 건배를 외치기도 했다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다가, 다시 모였다가를 반복했다.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가고, 적당한 취기에 서로의 이야기가 깊어졌다.
밤바다
술을 마시기 전 우린 다시 한번 바다에 들어갔었다. 저녁을 먹고 좀 쉬다 보니 다시 바다가 보였던 것이다. 배가 우리를 실어다 두고 하얀 포말을 만들며 떠나간 그 길 위를 다시 들어갔다. 하늘엔 별이 떠오르고, 완전한 원의 형태를 가진 달이 떠올랐다. 전기불이 없어도 세상은 밝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물속까지 빛이 들어오는 달의 힘을 빌려 우린 다시 한번 바다로 들어갔다. 해가 떨어진 다음이라 사고가 생길지 몰라 강사로 활동하는 친구들이 안전요원을 해주기도 하고 다시 저녁 먹기 전처럼 물속으로 들어갔다. 낮과는 다른 바닷속 모습에 황홀함과 신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 새가 고기를 잡으러 공중에서 입수를 하듯. 우리는 곳곳에서 프리다이빙 선수들처럼 머리가 물속으로 처박힌다. 모두들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별, 바람, 그리고 달빛
사람들 사이엔 당연히 관계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깊고 얕음이 될 수 있고, 중요함과 덜 중요함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친함과 낯섦으로 나타 날 수 있는데 어느 부분은 자연스레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관계성이다. 우린 함께한 시간에 비례해 관계성이 깊고, 중요해졌으며, 친함으로 발전했다.
저녁을 먹고 수영도 하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모닥불을 보고 있으면 다들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할 때가 온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파도의 소리와 장작이 타들어가면서 내는 모닥불 소리는 마치 카페에서 틀려오는 음악과 같다. 거슬리지도 않으며 방해되지 않는 음악 같은 소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낭만 있어 보이게 만들어 준다. 그저 그런 이야기 일수도 있고, 마음 깊이 담아두어 다시는 꺼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도 배경음악 탓에 세상밖으로 나오는 것일지 모른다.
각자의 이야기는 누가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을 알지만 뱉어본다. 뱉고 나면 개운하고 속이 편안하니 말이다. 누군가는 그 이야기가 돌덩이 같이 무거울 수도 있고, 공기보다 더 가벼울 수도 있다.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흘려보내지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그저 각자가 그렇게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말이다. 무엇이든 무거워지면 가지지 않은 것보다 못한 법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깔려버린다면 무엇이 도움이 될까? 이야길 하면서 조금이라도 무게를 덜어 낼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고 누구도 방법을 줄 수 없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끝임이 없고, 마르지 않았다. 모닥불이 꺼지고 숯까지 까맣게 되어서야 우린 잠에 들었다. 어스름 해가 떠오르는 것 같지만 일단 누워 잠을 청해 본다. 또 한 번의 여행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였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대,
배는 해가 중천에 떠 오를 때쯤 도착한다. 어제 짐을 정리하고, 내가 먹었던 음식 쓰레기나 빈 물통을 집어 들고 나왔다. 밖으로 나와서 다시 바다에 들어가 몸을 식히고 잠도 깨고 나온다. 여러 명이 정리하니 순시 간에 자리가 정리된다.
반짝반짝 빛이 난다.
우리 모두가
고민이 있었던 시간이 존재하고 그 일을 헤쳐 나갈 것이고, 힘들면 도와줄 친구들이 있으니 말이다. 서로를 믿고 서로가 힘이 되어 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끊어질 인연이라도 지금은 우리 모두가 진심이기 때문에 그거면 된 거다.
가는 길을 반대로 돌아왔다. 역시나 H5에서 내렸고, 우린 이 날을 남겼다.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날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