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이야기
라스아부갈룸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합을 떠나야 할 날짜를 정하게 되었다. 마음 같아선 이곳을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들과 행복한 순간을 더욱 누리며 즐기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여행 중이었고, 한 곳에서 머무르기엔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 컸다.
세계여행이라는 꿈만 같은 일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움츠려드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모른 일이 꿈꾸는 대로 된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을 텐데 참 쉽지 않은 현실이다. 모아둔 돈은 많지 않고, 보고 싶은 곳은 많으니 현실과 이상의 어느 적절한 곳에서 타협을 볼 수 밖엔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합에 사는 것도 어느 정도의 시간을 양보한 것이다. 물론 프리다이빙과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다합이라는 곳이 들어오긴 쉬워도 나가긴 어여운 곳이라는 것은 간과했던 것이다. 누가 조종하지 않아도 매일, 매 시간, 매 분, 매 초마다 밀려들어오는 파도처럼 새로운 사람들은 밀려들어왔다. 다시 한번 그들과 함께한 시간을 보내며 친해지다 보면 1-2주는 금방 지나가 버린다. 시간이 그렇게 지나간지도 모른 채 현실의 시간은 바뀌어 버린다.
파도와 같이 매일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몇몇이 우리와 새롭게 합류했다. 그들의 사연이 어떻게 되었든 여기에 얼마나 머무르든 상관없이 마음만 맞으면 함께하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체육대회 이후엔 대화의 시간이 더욱 심해졌다. 특별히 바다를 나갈 일이 없고, 수업을 들을 일이 적어지면서 '동네 이장'처럼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늘 그 자리에 함께 했다.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고, 생각을 공유하다 보면 쉽게 가족이 된다. 그러면서 점점 대 가족이 되어간다.
누구와 함께하는지, 왜 함께 하는지 중요하지 않아 졌다. 그저 여행을 하러 왔을 뿐이고, 이곳에서 오늘이라는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라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매일 보는 사이면서 앞으로 볼 수 없는 사이.
진짜 친하고, 함께하는 중이지만 그들의 가족사 하나 아는 것이 없다. (이야길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으로 중요하지 배경을 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다. 조건이 없고, 그저 친구로만 생각하는 우리의 관계처럼 말이다.
새로운 식구
내가 집을 떠나 라스아부갈룸에 다녀와서였다. 다합에 처음 도착해서 들어간 집에도 변화가 생겼다. 조금 큰 집에서 여유롭게 공간을 쓰던 우리가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여행자 집은 머리를 대고 눕는 곳이다.'라는 말처럼 나에게도 집은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라스아부갈룸에서도 겨우 하늘만 가릴 수 있는 움막 같은 곳에서 잠을 자도, 기분 좋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이니까 말이다.
다합은 여행자들이 많이 머무르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집은 만실이고, 한국사람들은 마치 도미토리처럼 숙소를 공유하여 게스트와 함께 살아하는 방법은 택한다. 단기는 한 달, 장기는 세 달까지 집을 임대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다합에서 바다가 가까운 곳은 늘 방이 없다. 단기로 계약한 방이 빠지기라도 하면 금세 한국 커뮤니티에 올라오고 그 방은 하루도 안돼서 다시 나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사 가는 사람과 들어오는 사람이 만나서 서로 인사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 빈 방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집을 구해서 계약을 하는 것이 어렵지 한번 집을 구하고 나면 집에 드릴사람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떤 집을 구하든 임대 나온 집이 있다면 바로 구하는 게 이곳의 규칙이다. 역시 우리도 여행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넓은 집보다는 생활비를 아낄 수 있는 작은 집을 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구한 두 번째 집은 작긴 하지만 저렴하긴 아주 저렴해진 집이었다.
집을 구했으니 같이 살 사람을 구해야 했다.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동기는 당연히 나와 함께 할 것이고, 예윤이도 일정을 맞추겠다 했으니 함께 가기로 한다. 그리고 함께 합류할 친구를 구하려다 새롭게 다합에 도착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친구들은 다합에 매일 들어온다. 각자의 목표와 각기 품고 있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다 전혀 무계획으로 도착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장기 여행자들이 돕는다. 우리도 다합에 처음 들어와서 숙소를 잡고 집을 구했던 것처럼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초대해 며칠 머물게 하고 집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맡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누군가는 우리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다.
그러면 그들이 또 누군가를 도와줄 것이고, 점점 그렇게 사람들이 다합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잠시의 시간을 벌 수 있으니 서로 이익이 되는 일이다. 그 잠깐의 도움은 생각보다 크다. 처음이라 전혀 아는 것이 없을 때 작은 도움이라도 크게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마치 헬스장에서 무거운 기구로 운동할 때 힘이 빠져 더 이상 들어 올릴 힘이 없을 때 손가락 하나만 거들어 도와준다면 세상을 다 들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도 처음 여행 온 사람들의 손가락이 된다.
밥을 같이 먹는 사람 식구(食口)
늘 저녁은 먹는 사람이 불특정 하다. 어느 땐 이 가족들과 어느 땐 저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이제 더 이상 이들과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지는 게 아쉽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줄어드는 현재에 충실하기로 한다. 모두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소중하고 귀하다.
되도록 집에서 밥을 먹으려 했다. 만들어 먹는 반찬에 밥만 해서 먹으니 집 맛에 맛이 있다. 딱히 자랑할만한 음식은 없었다. 하지만 맛없는 음식은 전혀 없었다. 떠 놓은 밥을 다 먹고도 밥 솥에 있는 밥을 빡빡 긁어먹을 정도로 맛있었다.
각 집에서 만들어 온 반찬이 한가득이다. 식탁이 없어도 바닥에 내려놓고 먹어도 그것대로 낭만이다. 멀리 있는 음식을 전달받아먹을 때도, 밥을 더 달라고 빈 그릇을 건네주면서도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식사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다.
이제 내가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날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 시간을 더 소중하게 만드는 촉매가 되는지도 모른다.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같아 보여도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좋았다.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도록. 각자의 삶이 흐트러지지 않고 올바르게 설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