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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Jan 24. 2021

살다 보니 어쩌다, 흐르고 흘러

"왜 기자 했어요?" 


처음 만나면 많이들 묻는다. 물론 자기소개서야 거창하고 진지하고 묵직한 얘기를 제법 써뒀지만 불쑥 들어오는 질문에 가장 적당한 대답은 "살다 보니 어쩌다가요"였다. 이렇게 답하면 다들 어떻게 살다 보니 어쩌다 기자가 될 수 있냐고, 그게 가능한 직업이냐고 묻지만 정말이다. 살다 보니 어쩌다. 고등학생 때 아나운서를 꿈꾸기 시작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하고 대학 4년 내내 아나운서 레슨을 받던 내가 마지막 학기 재학 중에 얼떨결에 기자가 됐다. 정말 살다 보니 어느 날 '노트북 들고 다니는 대학생'에서 '노트북 들고 기사 쓰러 가야 하는 기자'가 된 거다.



성격은 비서가 딱인데


한 때 나는 비서를 하면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입밖에 꺼내보지 못한 막연한 꿈이기도 했다. 계획 짜는 걸 정말 좋아했으니까. 취업을 일찍 한 것도, 꽤나 많은 일을 하는 것도, 하루 24시간을 꽉 채워 사는 것도 이 성격 덕이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정말 1년에 다이어리를 몇 권씩 썼다. 일기장, 스터디플래너, 공부 외적인 것들을 적는 스케줄러, 생각나는 것들을 끄적이는 백지 노트 등등. 계획을 짜고 빈칸을 채워나가는 걸 그냥 즐긴다. (내가 생각해도 살짝 무섭다.) 


그래서였는지 입사 초반 꽤나 방황했다. 자기소개서에 담긴 거창한 이유는 신입사원에게는 그저 꿈이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퇴사할 때까지, 내가 죽을 때까지 절대로 못 이룰 꿈이었다. 꿈이 없고 목표가 없으면 계획을 못 세우는 나였고, 계획이 없으면 방황하는 나다. 매일 새벽에 출근하면서 다이어리가 텅 빈 날이 반복되자 나는 어느 날부터 방황하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그 방황하던 시기에 기댈 곳이 없었다는 거다. 일찍 취업을 한 나를 향하는 축하와 부러움, 부모님과 교수님들의 기대 앞에서 나는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나의 방황을 솔직히 털어놓기에 내 친구들은 아직 취업이 너무나 간절한 대학생이었으며, 나의 친한 언니, 오빠들에게 취업은 더욱더 간절했다. 그래서 기댈 곳 없이 시작한 나의 방황은 어느샌가 '버텨야 한다'라는 압박으로 이어졌다. 다들 성공했다 말하지만 나 스스로는 내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채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로. '나 지금 숨이 막혀. 나는 이 사원증이 너무 버거워 지금.'




'뭘 해도 잘할 거야'
이 말 한마디가 쏘아 올린 나의 늦은 사춘기


사람들은 내게 스물셋 그 나이에 회사를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했다. 회사 선배들도 학교 선배들도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방황이 커지면서 사람들은 또 내게 말했다. '뭘 해도 잘할 거라고'


'그럼 나는 뭘 해야 제일 잘할까'라는 답 없는 질문과 스물다섯에 찾아온 사춘기가 맞물리면서 나는 모든 것에서 멈춰 섰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와 무리한 스케줄로 인해 바닥나 버린 내 체력은 정말 최악의 시너지를 만들어내 이상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피곤하고 기운이 없으니 매일 새벽마다 마셨던 피로회복제는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혈압은 정상 기준 아래로 떨어졌고 살은 계속 빠졌다. 매일 같이 울어대는 탓에 눈가의 살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이유 없이 열이 나고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에 할 수 있는 건 그저 누워있는 것 밖에 없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시도 때도 없이 울면서 후회만 했다.


아파봤고, 무너져봤고, 울어봐서 복귀를 결정하는 건 정말 어려웠다. 얼마나 힘들지 알면서도 '좋아해서' 딱 이 한 가지 이유가 다시 뛰어들게 했다. 이 선택이 정답이라는 순진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이 반드시 옳고, 어떤 길이 정답이라고 여길 만큼 어리지 않으니까. 무엇을 고르든 언젠가는 반드시 후회할 선택이었을 거다.


살면서 하는 선택 중에 정답은 없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할 뿐.

대신 이 순간 나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있다. 복귀를 고민하는 그때의 나에게 수도 없이 던졌던 질문.


다시, 뉴스 할 준비 됐어?



이 질문이 곧 제 에세이의 제목이자, 이제야 비로소 마주하기 시작한 기억들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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