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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Feb 10. 2021

나는 네가, 이래서 좋아

입사하자마자 나를 맡았던 팀장님은 인연이 있는지 꽤나 오랜 기간 같은 팀에서 근무했다. 같은 대학을 나와서일 수도 있고, 그냥 코드가 잘 맞아서 일수도 있고.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참 예뻐라 해주시는 게 느껴지는 분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카페에서 뜬금 고백.


"나는 네가, 이래서 좋아"



이유를 들어보니 '다 내려놓고 비움 그 자체'인 성격이 좋다고. 어떻게 보면 자포자기, 나쁘게 말하면 세상 고고하게 무언가를 욕심내지 않는 내 성격이 좋다는 거였다. 의외였다. '무슨 어린애가 이렇게 세상 아쉬운 것도 없고 떼를 쓸 줄도 모르냐', '뭐가 그렇게 담담하냐' 뭐 이 정도로 생각하실 줄 알았는데 이런 성격이 마음에 드신다니. 


그 자리에서 더 길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사실 나는 원래부터 비움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 그래서 내려놓음에 익숙해진 거였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받아들일 것

회사는 학교와 달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생긴다. 학생일 때는 하고 싶은 전공을 선택할 수 있고, 대학생의 경우 듣고 싶은 과목까지 선택할 수 있으며,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오는데 직장생활은 그렇지 않으니까.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잘 모르는 분야도 피할 수 없으며,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도 동료로 같이 지내야 하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속상한 순간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그만큼의 결과가 따라오지 못할 때인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고 두 번째를 꼽자면 사실이 아닌 내용이 소문으로 돌고 돌아 오해를 살 때. 실패에 있어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문도 마찬가지.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로 나를 아프게 찔렀을 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내 반응은 거의 한결같다. 입을 열지 않는다. 

그저 묵묵하게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기도 하고 조용히 자리를 뜨기도 한다.

마치 내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면 이어폰을 낀다. 경험해보니 속이 시끄러울 때는 엄청 신나는 아이돌 음악보다는 차라리 나랑 감정선이 비슷한 뉴에이지나 발라드를 듣는 게 진정에 좋았다. 그리고 이 침묵은 정확히 일이 끝날 때까지만 가능했다. 마지막 뉴스가 끝나고 문 밖을 나서는 순간 나는 그냥 상처받은 어린애에 불과했다. 퇴근길 친구한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서 엉엉 운 날도 많았으며, 친구랑 둘만 있는 대화창에 아무 맥락도 없이 '화나', '속상해', '억울해' 이런 말들을 보내 놓기도 했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물을 쏟아내는 건 그래야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듣던 친구가 "얘기 다했어? 그럼 떡볶이 먹으러 가자"하는 순간이 나는 너무 좋았다.


소중한 나의 일에 감정이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

또 다른 선배가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네가 이래서 좋아'했던 이유는 이거였다. 정말 소처럼, 일만 해서.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일이 전부였다. 간절하게 꿈꿨던 방송이 내 직업이 되고 일이 되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일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해서 나를 돌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어쨌든 어떤 선배 눈에는 일만 하는 모습이 좋게 보였나 보다. 


어떤 선배는 입사 초 나를 따로 불러서 특별히 당부하기도 했다.

"스물세 살, 남자 친구 만나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고 싶은 나이인 거는 알겠는데... 

적어도 내 앞에서 남자 때문에 울고 불고 식음 전폐하는 꼴은 보이지 마라."


정말 필터링 하나 없이 세상 냉정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생방송을 해야 하는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뉴스는 감정의 흔들림이 허락되지 않는 일이니까. (사실 신입 때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선배는 우는 법을 알기는 아는 걸까?' 혼자 생각한 건 비밀)


안타깝게도 그다음부터 울 일은 꽤나 많이 생겼다. 특히나 더 생방송 직전에.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울고 불고 식음을 전폐할 일은 없었지만 세상에 울 일이 꼭 사랑 때문만은 아니니까. 울고 싶은 순간마다 혼자서 '정신 차려, 지금 온에어 직전이야', '집중해 오늘 녹음 몇 개나 남았는데' 채찍질하고 나니 어느덧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간절히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

좋은 일이 생겨도 여기저기 광고하지 않는 사람. 

'내일 출근하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만' 마음을 내주는 사람.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 완벽히 이런 사람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든 꿈이든 딱 괜찮을 만큼만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사람. 

뜨거운 감정보다는 차가운 머리가 먼저인 사람. 

한 때는 사람을 너무 해맑게 무언가를 사랑해서 탈이었던 내가 사랑이 무서운 어른 아이가 되어버렸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도 지금 이런 네 모습이 좋은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인 건 아닌가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부탁도 한다.

방송하는 한만, 그만둘 때까지만 버텨줘.

언젠가 뉴스룸을 떠나는 날이 오면 네가 좋아하는 소박한 햇살도, 가끔 비치는 무지개도 마음껏 사랑하면서 살자.

 

정말... 쉽지 않아, 방송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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