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이래서 좋아"
그 자리에서 더 길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사실 나는 원래부터 비움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이 그래서 내려놓음에 익숙해진 거였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받아들일 것
회사는 학교와 달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생긴다. 학생일 때는 하고 싶은 전공을 선택할 수 있고, 대학생의 경우 듣고 싶은 과목까지 선택할 수 있으며,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오는데 직장생활은 그렇지 않으니까.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잘 모르는 분야도 피할 수 없으며,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도 동료로 같이 지내야 하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속상한 순간은 최선을 다했음에도 그만큼의 결과가 따라오지 못할 때인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고 두 번째를 꼽자면 사실이 아닌 내용이 소문으로 돌고 돌아 오해를 살 때. 실패에 있어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문도 마찬가지.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로 나를 아프게 찔렀을 뿐.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내 반응은 거의 한결같다. 입을 열지 않는다.
그저 묵묵하게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기도 하고 조용히 자리를 뜨기도 한다.
마치 내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면 이어폰을 낀다. 경험해보니 속이 시끄러울 때는 엄청 신나는 아이돌 음악보다는 차라리 나랑 감정선이 비슷한 뉴에이지나 발라드를 듣는 게 진정에 좋았다. 그리고 이 침묵은 정확히 일이 끝날 때까지만 가능했다. 마지막 뉴스가 끝나고 문 밖을 나서는 순간 나는 그냥 상처받은 어린애에 불과했다. 퇴근길 친구한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서 엉엉 운 날도 많았으며, 친구랑 둘만 있는 대화창에 아무 맥락도 없이 '화나', '속상해', '억울해' 이런 말들을 보내 놓기도 했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눈물을 쏟아내는 건 그래야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듣던 친구가 "얘기 다했어? 그럼 떡볶이 먹으러 가자"하는 순간이 나는 너무 좋았다.
소중한 나의 일에 감정이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
정말 필터링 하나 없이 세상 냉정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생방송을 해야 하는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뉴스는 감정의 흔들림이 허락되지 않는 일이니까. (사실 신입 때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선배는 우는 법을 알기는 아는 걸까?' 혼자 생각한 건 비밀)
좋은 일이 생겨도 여기저기 광고하지 않는 사람.
'내일 출근하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만' 마음을 내주는 사람.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직 완벽히 이런 사람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든 꿈이든 딱 괜찮을 만큼만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사람.
뜨거운 감정보다는 차가운 머리가 먼저인 사람.
한 때는 사람을 너무 해맑게 무언가를 사랑해서 탈이었던 내가 사랑이 무서운 어른 아이가 되어버렸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도 지금 이런 네 모습이 좋은지.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인 건 아닌가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부탁도 한다.
방송하는 한만, 그만둘 때까지만 버텨줘.
언젠가 뉴스룸을 떠나는 날이 오면 네가 좋아하는 소박한 햇살도, 가끔 비치는 무지개도 마음껏 사랑하면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