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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Sep 26. 2023

다이어트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안 움직여 인간'의 운동 입문기


새해 목표를 적을 쯤이 되면, 언제나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 이번에는 진짜로 다이어트해야 하는데.' 매년 똑같은 목표를 세우는 것도 지긋지긋했지만 별 수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영어 공부하기, 다이어트하기. 이 '갓생 3종세트'는 내가 평생에 걸쳐 이뤄야 할 숙제였으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다이어트는 내게 철천지원수 같은 존재였다.





'살이 잘 찌는 체질'의 통통 일대기


다이어트, 식단 조절, 유산소 운동!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죄책감을 주던 이름들이다. 살이 잘 찌는 체질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니. 그냥 의지박약형 인간의 변명 아니야? 먹은 만큼 찌고 움직이는 만큼 빠지는 거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먼지 쌓인 앨범을 꺼내 들어 진실을 아주 선명하게 입증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음식 섭취의 선택권 없이 오직 분유만 먹고살던 신생아 시절부터 4단 소시지 팔을 자랑했던 나의 '통통 일대기'를!


유난히 뽀송하고 둥그런 아기였던 나는 10여 년이 지난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이미 키 162cm를 달성한 어린이가 되었다. 물론 통통한 체형을 쭉 유지한 채였다. 하루 종일 뛰어놀아도, 저녁을 굶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한 배에서 태어난 세 살 터울의 언니가 한평생 갈비뼈가 보일 정도의 마른 체형으로 성장해 온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일이었다.




'절대 안 쪄 인간'과의 조우


가끔은 너무 억울했다. 나는 또래보다 많이 먹은 적도, 방 안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은 적도, 매일같이 초콜릿을 챙겨 먹은 적도 없는데! 왜 죽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항상 통통한 걸까? 그렇게 이 체형의 원인을 찾아 헤매던 13살 무렵,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생겼다. 가장 친한 친구가 혼자 피자 한 판을 혼자 해치우는 걸 본 것이다.


그 친구는 나보다 키가 조금 작고 마른 체형이었는데, 3분 안에 햄버거 세트 한 개를 먹어치우는 엄청난 기록을 지니고 있었다. 같이 즉석떡볶이라도 먹는 날이면, 냄비 하나를 후딱 비우고는 이야기했다. "아, 피자 먹고 싶다." 작은 몸에 어떻게 그 많은 음식이 다 들어가냐며 경이로워하자, "우리 가족은 다 이렇게 먹어!"라는 태연한 답이 돌아왔다.


더 신기한 건 만 칼로리 챌린지를 하듯 먹어치워도 절대 살이 찌지 않는 그의 체질이었다. 허벅지 사이가 붙는다는 게 뭔지, 팔뚝이 둥글다는 게 뭔지 절대 모를 것만 같은 친구에게 "너 대체 몇 킬로야?"라고 물었다.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 39킬로? 그 정도 될걸?" 그 대답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아, 이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로군.




언제까지 다이어트를 해야 하나요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고 해서 날씬한 체형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춘기가 시작된 14살부터 19살쯤까지 다이어트라는 새해 목표를 매년 충실히 이행해 46kg을 유지했다. 매일 강박적으로 2시간 가까이 운동을 하고 현미밥과 닭가슴살만 우적우적 씹어먹는 괴상한 다이어트를 꽤 오래 지속한 덕분이었다.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는 대신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다. 땀이 뻘뻘 흐를 정도로 운동을 해도 소용없었다. 식단을 무리할 정도로 절제하지 않으면 늘 살이 붙었다. 그래서 냉동 닭가슴살을 주문했다가, 너무 질리면 훈제오리를 물에 삶아 먹었다가, 너무 비싸면 곤약 젤리로 식사를 대체하는 해롭기 짝이 없는 식습관을 유지했다.


이 때문인지, 만 10세에 이미 162cm를 달성했던 내 키는 이후 약 10년간 겨우 3cm 더 자라 165cm에서 멈춰버렸다. 보통은 부모님보다 조금 더 크는 경우가 많다는데, 엄마보다 작은 키에 머물게 된 것이다. 만일 성장기에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꿈의 키였던 168cm를 달성했을지도 모르는데! 몸무게 몇 kg이 대수가 아니라는 걸 때는 미처 몰랐다.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이런 무리한 다이어트와 약간의 거리를 두며 살게 됐다. 먹고사는 데만도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2시간씩 운동할 만큼 한가하지도, 닭가슴살만 먹은 상태로 밤을 새워 일할만큼 용감하지도 않았다. "식사 한번 하시죠."라는 업무 약속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미친 듯이 폭식을 하며 산 것도 아닌데, 그냥 사람답게 산 것뿐인데 매년 차곡차곡 살이 쪘다.


불어나는 체중만큼 스트레스도 커졌다. 디톡스 다이어트, 원푸드 다이어트, 저탄고지, 샐러드 다이어트, 마녀수프, 지중해식 식단, 간헐적 단식... 이제는 안 해 본 게 없을 지경이었다. 빈틈없이 딱 맞는 스키니진을 기준으로 다리가 들어가지 않을 때마다 다이어트를 했다. 양배추와 닭가슴살을 삶아 먹고 아침 일찍 일어나 1시간 반씩 운동을 하니 한 달 만에 9kg이 빠졌다.


딱 맞던 바지가 오히려 널널해졌다. 얼굴은 아주 갸름한 달걀형이 됐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너무 힘이 없어서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이 늘었다. 미용실에 갈 때마다 '어쩜 이렇게 머리숱이 많냐'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어느새 정수리에 하얀 틈이 보였다. 어느 날부터는 피부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 불가능한 생활을 지속해야만 했다.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로 몇 개월간 완벽하게 습관을 지키다가도,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바로 요요가 왔다. 10킬로를 빼고 나면 다시 15킬로가 찌는 식이었다.


불행한 다이어트에는 더 큰 불행이라는 이자가 붙는 모양이었다. 결국 다이어트를 하기 전보다 훨씬 불어난 몸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사람마다 적당한 체형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나는 내 몸을 아끼지 않고 젓가락처럼 날씬한 다리만을 동경해 대가를 치르게 됐다.




움직이는 건 정말 싫어


이렇게 몇 년의 다이어트를 반복한 뒤 내게 남은 것은 딱 하나였으니, 그건 바로 멋진 몸매도, 건강한 생활 습관도 아닌 '운동하기 싫어하는 마음'이었다. 칼로리를 소모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모든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어차피 조금 움직여 운동 효과가 없을 바에야 차라리 침대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겠다는 대쪽 같은 고집을 가진 자가 된 것이다. 어쩌다 운동할 때면 정말이지 죽상을 하고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도했다. 이제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오랜 다이어트는 내게서 운동의 즐거움을 앗아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운동과 담을 쌓은 채 살게 되었다. 매일 200개가 넘는 스쿼트를 하고 3,000번씩 줄을 넘던 날들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진정한 '안 움직여 인간'으로 거듭났다.


분명 어릴 적에는 꽤나 활발한 아이였는데, 언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언제나 체육 수행평가 A를 거머쥐고, 정글짐 꼭대기에 가장 먼저 도달하며, 트램펄린 위에서 몇 시간이고 내려올 줄 모르던 활동성은 더 이상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서글퍼졌다. 다시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되찾고 싶었다.





다이어트는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이런 내게 변화가 찾아온 것은 올해 초였다. 매년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다짐하던 1월 1일, 그 무렵. 올해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매년 고스란히 가져오던 새해 목표 3종세트에서 다이어트를 과감하게 지우기로 한 것이다. 대신 이렇게 적었다. '운동의 즐거움 알아내기.'


그렇게 평소와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수영을 시작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를 테면, 아침에 눈을 뜨면 '아, 오늘 운동 가지 말까?'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는 것. 수영장의 차가운 물을 생각하면 따뜻한 이불속에 있는 발가락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대로 한 시간 더 자고 일어나면 정말 개운할 것 같은데. 이불 밖은 너무나 험난하고 위험한데!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였다. 과감하게 이불을 걷어내고 수영가방을 챙기는 것. 10kg를 감량할 필요도, 삶은 양배추를 씹으며 인상을 찌푸릴 필요도 없었다. 수영복 사이로 군살이 튀어나와도, 근력이 부족해서 레인 끝에 매달려 헉헉 거려야 한대도 괜찮았다. 꾸준히 나가기만 한다면 목표를 이루는 셈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제법 괜찮지.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에 두 발을 디뎠다.




한 걸음씩 레벨업


다이어트를 포기하고 운동의 즐거움을 택한 효과는 대단했다. 수영을 시작한 이후 첫 3주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도장을 찍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제법 멋진 일도 생겼다. "회원님, 이름이 뭐죠?" 수영장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를 일이 없기 때문에, 3주를 다니면서도 그 누구와도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물음에 "송혜교요!"라고 답하자, 엄청난 소식이 돌아왔다.


"중급반 명단에 이름 올려둘 테니 다음 달 1일부터는 옆으로 넘어가세요." 비록 초급반과 중급반 사이에는 줄 하나 걸려있는 게 전부였지만, 한 칸 넘어가라는 말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진짜요옥-?" 하는 나의 반응을 본 선생님이 씨익 웃었다.


아직 자유형 25m만으로도 숨을 헉헉거리지만, 가끔은 배영을 하다 내가 일으킨 물살에 내가 물을 먹는 우스운 꼴이 되지만, 그래도 무언가 해낸 기분이 들었다. 한 달 만에 중급반에 가다니!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끄는 것조차 힘들어서 스마트 전구를 사고, 가끔은 너무 귀찮아서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참았던 나의 '안 움직여 생활'에 역사적인 한 줄이 적히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운동을 안 하니 체력이 약해지고, 체력이 약하니 운동을 못 하는' 나의 끝없는 저질체력의 굴레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다. 무언가 새로운 감정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리 잡는 게 느껴졌다. 비록 허우적대며 물은 조금 먹겠지만, 어쩌면 몇 년간 나를 괴롭힌 이 지긋지긋한 구렁텅이에서 헤엄쳐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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