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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교 Oct 03. 2023

수영장에 사이비가 나타났어요!

'안 움직여 인간'의 운동 입문기


집순이인 내게 집을 떠나 단체 운동의 터전에 입성한다는 건 큰 산이었다. 특히 가족을 제외하고서는 하루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이 훨씬 많은 나로서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살을 훤히 드러내며 매일 마주칠 결심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곳에 꾸준히 출입하다 보면 별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상한 사람을 접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는 단체 운동의 부작용 같은 것이다. 평화롭게 운동할 수 있길 간절히 염원하던 내게도 수영장 빌런을 마주치는 시련이 닥쳤으니, 나의 '움직여 생활'에 차질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수영장의 유명인사


나는 아빠와 함께 수영을 다녔다. 아빠는 이미 수영을 할 줄 알았지만, 면허가 없는 나를 수영장에 데려다 줄 겸, 기초를 다시 다지겠다는 마음으로 초급반에 함께 등록해 주었다. 여자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챙겨 입고 나와보니,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빠!" 하는 나의 외침에 수영장을 떠다니던 아주머니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는 정말 엄청난 동안이었다. 환갑을 앞둔 나이지만, 과장 조금 해보자면 40대 같았다. 누가 봐도 곧 서른인 딸을 둔 아빠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신입 회원이라면 응당 신고식을 거쳐야 하는 모양이었다. 중년의 여성 회원들이 몰려와 나와 아빠를 둘러싸고 칭찬을 쏟아냈다. 엄마와 딸이 같이 다니는 건 많이 봤어도, 아빠와 딸이 함께 운동을 다니는 건 드문 일이라나. "우리 남편도 이렇게 애들 데리고 다니면 좀 좋아? 시간만 나면 술 마시러 나가버려! 집안에 붙어있는 꼴을 못 봐 아주!" 아주머니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남편 욕을 하다가 떠났다. 어쨌거나, 그날부터 아빠와 나는 수영장의 유명인사가 됐다.




우리 수영장에 불륜 커플이 있대요


그러던 어느 날, 수영장에서 새롭게 사귄 친구가 내 귓가에 소문을 속삭였다. "이번에 우리 반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있는데... 옆 레인에 원조교제 불륜 커플 봤냐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매일 같이 다닌다고 소문내더라." 이 코딱지만 한 동네에서 공개적으로 바람을 피웠다가는 3일 안에 면민들 사이에 소문이 쫙 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원조교제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반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애초에 젊은 여성도 나밖에 없지 않은가. 소문의 진상을 깨닫는 데는 3초가량이 더 걸렸다. "나야? 그 불륜녀가?"


사실 우리가 부녀지간이라는 진실은 수영장 내에서 이미 유명했기 때문에, 아빠도 나도 딱히 헛소문을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웃기는 사람이네..."라며 넘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 없이 혼자 수영하고 있는 나에게 다른 회원이 다가와 물었다. "아빠는 어디 가시고 혼자 왔어?"


그러자 저 너머에서 듣고 있던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를 빽 질렀다. "아빠였어?!"라고. 그리고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며 탈의실로 돌아갔다. 비록 사과를 받지는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날 이후로는 더 이상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지 않는 듯했다.




아가씨, 남자 소개해 줄게


그의 기행이 여기에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구와 내가 나란히 유아풀에 몸을 담그고 쉬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내 팔을 덥석 잡았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그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아가씨들은 다이어트 고민 많지? 우리 교회로 와. 내가 기도해 주면 살이 싹 빠지고 아픈 것도 낫는다니까?"라는 괴상한 말을 던지며, 허락도 없이 몸을 조물거렸다.


그리고는 "다음 주 수요일 오후에 뭐 바쁜 일 있나? 바쁜 일 없으면 우리 교회 놀러 와. 내가 목사거든. 우리 남편도 목사야. 목사님이라고 불러." 같은 말을 하며 우리를 교회로 초대했다. 나는 곧바로 거절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는 초대를 수락했다.


우리가 반응을 해준다고 느낀 것인지, 이번에는 잔뜩 신난 표정으로 남자를 소개받을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나이도 너희랑 얼추 비슷하고 집안에 돈이 많아. 부모가 서울에 땅이랑 집을 엄청 가지고 있는데 다 걔 명의로 물려줄 생각이라니까?" 서울에 집이 있든, 두바이에 빌딩이 있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가 무슨 중세시대 백작가 영애도 아니고, 토지를 보고 시집가는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지 않았는가.


이미 그에게 진절머리가 난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필요 없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남자를 소개받을 것을 권했다. 종로에서 제일 큰 금은방집 아들이라나. 그의 재력에 관한 상세 정보도 계속해서 업데이트되었지만, 친구가 꾸준히 거절한 덕분에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다.




수영장에 사이비가 나타났어요


며칠 뒤, 문제의 수요일이 찾아왔다. 친구가 교회에 초대받은 바로 그날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친구에게 금은방집 아들의 재력을 어필하며 한번 만나보라고 우겨댔다. 친구가 부담스러워하며 자리를 피하려 하자, 이내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그 집 아들한테 장애가 있어. 지능은 3살 정도이긴 한데 돈이 많으니...  너처럼 참한 아가씨가 결혼해 주고 곁에서 평생 돌봐주면 얼마나 좋아?" 알고 보니 수요일 오후를 콕 집어 교회로 우리를 초대한 이유도 그 남자와 마주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친구가 걱정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가 말한 교회에 대해 알아보았다. 역시나 정식으로 등록된 교회가 아니었다. 기도를 하면 아픈 곳이 낫는다는 말부터 무턱대고 타인의 신체를 만지는 행동까지 납득 가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는데, 명확한 진실을 알아내고 나니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어서, 수영장의 오랜 회원으로부터 더더욱 놀라운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 처음 수영을 배우는 거라던 그의 이야기는 거짓말이었고, 지난해에도 수영장에 등록해 젊은 여성들에게만 접근한 이력이 있었으며,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운동을 그만두었다가 반년쯤 지나면 다시 젊은 여성 회원을 찾아 문화센터 프로그램에 등록한다는 거였다.


당시 사람들 사이의 주된 화제는 모 사이비 집단이었다. 마침 한 다큐멘터리에서 젊은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집단의 범죄를 폭로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사이비에 관한 경각심이 높아지자 더 이상 포섭이 어렵겠다고 느꼈는지, 그는 이내 자취를 감췄다. 작은 시골 마을의 수영장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스펙터클한 사건이었다.




이렇듯 수영장 빌런을 마주하면서, 수영장에 출석할 의지가 조금 사그라들기도 했다.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물에 풍덩 빠지고 싶었을 뿐인데, 경계심이 엄청난 치와와 같은 눈빛으로 문제의 인물을 주시하며 수영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수영장에 갔다. 내 목표는 꾸준히 운동하기, 그뿐이었으니까. 이제는 중급반이 되었고, 호흡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으며, 어느새 쉬지 않고 25m 레인의 끝에서 끝까지 헤엄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모든 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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