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아, 날 살려라.
젊은 시절 아주 재밌게 보았던 미드 시리즈 중 하나가, 그레이스 아나토미(Grey's Anatomy)다. 내용은 몇몇 의사들의 개인사 스토리에 그 의사가 돌보는 환자들의 개별 에피소드가 더해진 것이 하나의 회차가 된다.
나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는 시즌3 6화다. 이번 회차에 나오는 환자는 손에 화상을 입은 환자다. 그녀는 변호사 시험을 앞두고 있기에, 손이 어서 나아야 한다며 화상 치료에 절박함을 보인다. 이미 5번이나 떨어졌고, 이번엔 꼭 붙고 싶다며 의사들이 묻지도 않은 TMI를 주절주절 이야기한다. 그녀의 바람대로 주치의가 다행히도 이번 시험 전에는 손이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한다. 그녀를 주시하던 인턴이 이상함을 감지한다. 여러 번의 이야기 끝에 그녀에게서 자백을 얻어낸다. 사실은 스스로 손을 프라이팬에 지진 것이라고. 좀 더 세게 했었어야 했냐고. 이번에도 시험에 떨어질까, 너무 두려웠다고. 의사와의 이야기 끝에 그녀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에 동의한다.
나는 시험기간에 방청소를 무지 열심힌 한 적이 있다. 어차피 내일까지 공부해 봐야 되지도 않을 터. 공부를 하자니 마음만 벌렁거리고, 책이고 문제집이고 손에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그 더디게 가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청소를 했다. 그러면서 30분 1시간 2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몸을 쓰며 시간을 때우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숙면을 취했다. 당연히 시험을 망쳤다. 하지만 ‘어제 청소를 해서 그래.’라는 물리적으로 명명백백한 핑계가 있기에, 조금은 당당했다. 하지만 마음 한 켠 스멀스멀 올라오는, ‘어디서 거질말하니’라는 질문에는 조금도 당당할 수 없었다. 세상 모두를 속여라. 자기 자신은 못 속일 테니.
도망.
일단 튀자.
그땐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가도, 시간이 좀 흐른 후엔 정리가 된다. 그때, 내가 힘이 없었구나. 도망만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겠구나. 그것을 정면으로 맞닥뜨렸다간 스스로 무너질 것 같아서, 그것을 정통으로 맞고 그로기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 -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도망이라도 친 것이구나.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게 ‘잘했다.’ 해 주고 싶다. 그 도망마저 없었다면, 결과를 오롯이 받아 들고 좌절했을 나에게. 한 발짝 비켜서는 것을 선택한 나에게. 우리 조금씩은 바르지 말자고. 꼭 정통이 아니어도 된다고. 일단, 살아남자고. 살아남아야 후일도 도모할 수 있게 않겠느냐고.
연말. 요즘 내가 나에게 하는 핑계와 사람들이 하는 ‘올 해는 뭐 좀 하려고 했는데... OOO 때문에 못했다.’라는 여러 ‘핑계’를 들으며 - 그 핑계를 대기까지 ‘에그, 너 참 힘들었겠다.’하며 토닥여주고 싶다. 핑계의 다른 말은 어쩌면 ‘나 숨 쉬고 싶어요.’ 일 터.
올 해도 여러 사건들과 여러 사람들에게서 이리저리 쏙쏙 잘 피하고 살아남았다.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내년에는 조금 더 세련되게 도망쳐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