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반,
기나긴 여정 끝에 마주한 그곳은...
설국이었다.
새벽 4시 기상. 후딱 씻고 편의점에서 컵라면, 주전부리, 물을 샀다. 에너지를 충전해야 했기에 맥모닝 세트를 사서 차 안에서 먹으며 이동. 캄캄한 516 도로를 지나 무사히 관음사 지구 야영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6시 출발은 좀 이른듯하여 차에서 조금 멍 때리기로 했다. 한라산 국립공원 표지판 지도를 확인하고 출발 인증사진을 남긴 후, 아침 7시 반 호기롭 출발!
굳이 핑계를 대자면 전날 한 2시간 잤나.. 얼굴은 퉁퉁 부었어도 내 인생 첫 한라산인데 인증사진은 놓칠 수 없지! 사실 이때의 속마음을 얘기하자면 '관음사 코스가 그렇게 힘들어서 다들 기어서 올라간다던데 괜찮겠지? 백록담까지 올라갈 수 있겠지? 에라 모르겠다. 일단 못 먹어도 고!'
7시 반에 출발할 때는 쌀쌀한 가을 날씨였는데,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어느새 해가 뜨고 기온이 오르면서 외투를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온이 15도를 넘어가면서 어느새 반팔티 입고 눈밭을 걸어가는 이상증세에 도달하게 된다. 다행히 주변에는 반팔 티셔츠 입은 등산객 동지들이 있어 눈치 보지 않고 삼각봉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아이젠과 스틱 없이 호기롭게(는 사실 장비 없어서 못 샀음. 제주도에 11월 중반 폭설이 내리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고) 삼각봉 대피소에 이르니 그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정도면 한국의 스위스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TMI... 2013년 7월, 진짜 스위스를 다녀왔다. 여름의 스위스 풍경과 비교하기는 애매하지만, 개인적인 소감은 완전한 허언증은 아니었던 것으로) 시계를 보니 어느새, 11시. 백록담까지 남은 거리를 생각하면 이 타이밍에 뭐라도 먹어야 했기에, 형과 함께 김밥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삼각봉의 풍경을 보면서 먹는 김밥은 꿀맛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내려가고 싶었지만, 우리의 목표였던 백록담을 향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침내. 그렇게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한라산의 설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욕 빼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감탄사는 다 내뱉은 거 같은데, 10초마다 미친 풍경이 보이니까 결국 어휘력 고갈. 그렇게 '우와 미쳤다ㅏ!!!!!!' '찰칵'을 무한 반복하면서, 첫 한라산 등산 주제에 관음사 코스를 즐기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물론 코스는 정말 헬 오브 헬. 아이젠과 스틱 없이 설산을 오르는 게 보통 쉬운 게 아니었기 때문. 다행히, 이러다 죽겠다 싶을 때면 죽어도 좋을 만큼 멋진 풍경으로 한라산은 나를 조련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굴이 콧물과 땀으로 범벅이 될지언정 사진 찍는 건 포기할 수 없었다. 언제 다시 이런 풍경을 볼까 싶어서 거의 기계처럼 휴대폰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참고로 백록담은 하산 시간(오후 1시 30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나처럼 여유 부리면서 올라가다가는 백록담을 1분 컷 하고 내려가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그러니 삼각봉 코스까지 부지런히 올라가길 추천한다.(관음사 코스 하이라이트는 삼각봉 이후로 펼쳐지기 때문) 백록담을 구경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직감하고, 해발 1800m부터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진짜 숨이 턱까지 차올라 포기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너무 높이 올라와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에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액체가 볼을 타고 흘렀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나는 왜 그렇게 한라산 정상에 악착같이 올라야 했는가? 여러 이유들이야 많겠지만, 백록담 배경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튀김 우동 컵라면 인증샷을 찍고 싶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건 아니고 순전히 내 욕심이었다. 여러분, 인증사진에 집착하는 K-등산러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난 결국 그 미션에 성공했을까?
다행히도! 12시 50분 즈음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 무사히 도착했다. 기쁨의 눈물과 콧물을 닦는 것도 잠시, 수 백명의 등산객들로 북적한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더구나 백록담까지 왔으니 비석 인증샷을 찍어야 했는데, 대기줄을 보아하니 최소 3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다른 비석에서 사진을 찍기로 결심하고, 형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내 도착한 형과 함께 한라산 정상 인증사진을 남기고 눈 쌓인 백록담을 질릴 때까지 감상했다.
언제 또 백록담의 설경을 보겠냐며 사진과 영상을 열심히 남기고 대망의 튀김 우동 인증샷을 위해 시계를 확인했다. 이럴 수가!!!!!! 사진이랑 영상 좀 찍었을 뿐인데 벌써 1시 20분이라고? 아, 라면 먹을 시간이 모자라~ 결국 대망의 튀김 우동 사진은 비닐만 뜯고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 컵라면을 포기한 대신 한라산 정상과 백록담을 실컷 눈에 담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눈 깜짝할 새 시간이 흘렀고, 하산 시간인 1시 30분이 임박하자 어마어마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수 백명의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배낭을 다시 매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라올 때 관음사 코스로 왔으니 내려갈 때는 비교적 완만한 성판악 코스로 내려가기로 결정. 이때까진 몰랐다. 며칠 전 내린 눈이 햇빛에 녹아 거의 스키장이 되어 버렸고, 안전을 위해 설치해 놓은 밧줄에 의지해 거의 미끄러지듯이 내려갔다. 최대한 앞사람 뒷사람과 안전거리 확보하면서 썰매 타듯이 내려갔다는 후문. 스틱으로 내려가시는 분들이 약간 부러워하는 눈빛으로 날 본 것 같았는데 아마 기분 탓이겠지?
백록담까지 등반하면서 에너지를 다 쓴 까닭인지 아니면 진짜 풍경이 별로였던 건지 몰라도, 성판악 코스의 풍경은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몇 컷의 사진을 남긴 것을 제외하고, 하산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했기 때문이겠지. 게다가 계단은 얼마나 많은지 무릎 수명이 10년은 짧아진 듯한 느낌적인 느낌. 아침 7시 30분에 시작한 우리들의 여정은 오후 5시가 되어 끝이 났다.
* 2021년 11월 15일에 다녀온 등산기록입니다. 그때만 해도 야외 활동도 마스크를 껴야 했던 그런 코시국 시절이었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ㅎㅎ 그렇게 2년이 흘렀고... 2023년 12월 4일, 눈 쌓인 한라산과 백록담을 또 한 번 마주했습니다. 2년 전, 정상에서 바라보는 운해도 멋졌는데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멋진 운해가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차디찬 칼바람도 여전했습니다. 혹시나 궁금해하실까 봐 알려드립니다. 이번에는 아이젠도 챙기고 스틱도 챙겨갔습니다. 물론, 김치 사발면 인증샷도 성공했습니다악! (라면 수프를 반 이상 쏟았다는 게 함정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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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1. 2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은 건, 여전히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수라는 사실! 한라산탐방 예약시스템 홈페이지 주소도 함께 남깁니다. https://visithalla.jeju.go.kr/main/main.do
TIP 2. '관음사 코스 vs 성판악 코스' 고민이 된다면? 개인적으로는 가을/겨울 시즌에는 풍경이 훨씬 다이내믹한 관음사 탐방로를 추천합니다. 성판악 탐방로보다 편도 1km 정도가 짧은 점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거. 왕복 7~8시간 이상 소요되기 때문에 잘 판단해서 다녀오시길 바라며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