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관리하는 것이더라
목요일에 읽는 한 줄 인문학.
갈등을 피하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갈등을 관리하십시오.
-피터 드러커
지난 주말에는 테라리움 원데이 클래스에 다녀왔습니다. 총 다섯 번의 원데이 클래스로 이루어진 테라리움 취미반인데, 이번이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몇 가지 테라리움 작품을 만들어가며 새로운 즐거움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고 덕분에 집안이 보다 아기자기하고 화사해졌습니다. 마지막 시간의 주제는 덩굴식물입니다. 칡과 등나무를 조화롭게 감아가면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게 과제였습니다.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강사님이 웃으며 말을 꺼내십니다. “여러분, 갈등이라는 말의 어원을 아십니까?” 테라리움 원데이 클래스에서 갈등의 어원이라니 조금 생뚱맞은 느낌이 들었지만 무슨 사연이 있으시려니 하고 가볍게 웃으며 되묻습니다. “아니요. 갈등의 어원이 뭐죠?”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이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바로 여러분 앞에 있는 이것이랍니다. 칡과 등나무 이 둘이 서로 얽히는 것을 보고 칡나무의 ‘갈’ 등나무의 ‘등’이라는 말로 갈등을 만들었다고 해요.” 대답을 듣고 보니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얽히고설키는 관계니 오늘 수업에 조심히 임해달라고 속내도 드러내시네요.
초등학교 시절의 지식으로 돌아가보면 식물은 대개 뿌리줄기잎으로 구분됩니다. 대부분의 식물은 줄기의 힘으로 곧게 서서 자랍니다. 하지만 줄기가 단단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식물 또는 자연물을 의지하며 자라 가는 식물이 있는데 이게 바로 덩굴 식물이지요. 모든 게 식물이 제각기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덩굴식물의 세계에서도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칡나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방식이라고 하면 등나무는 반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칡과 등나무가 각자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게 없지만 서로 만났을 때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휘감으며 올라가려다 보니 엉퀴게되고 나중에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하게 심하게 꼬이는 일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관계에도 그런 일이 비일 비재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문제라고 할 것도 없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심각하게 꼬여버린 관계, 사람들은 이 칡과 등나무를 보고 ‘갈등’이라는 말을 탄생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강사분께서 제공해 주신 화분과 틀, 그리고 식물들을 바라보니 단어의 뜻이 강렬하게 와닿았습니다.
“첫 단계는 칡과 등나무를 풀어보는 일입니다.” 재료로 제공된 칡과 등나무도 서로 심하게 얽혀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것이니 말입니다. 하나를 잡고 휘감은 방향의 반대로 살살 달래며 풀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갈등을 맞이할 때도 같은 순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갈등의 어원 그 자체처럼, 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닐 수 있습니다. 칡소 오른쪽으로 감는 일과 등나무가 왼쪽으로 감는 일은 누구도 틀리지 않은 그대로의 일일 뿐이니까요.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읽었듯 이들은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고 아마도 처음에 칡은 오른쪽으로 감을 때 생존율이 높은 환경이었을 테고, 등나무는 그 반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칡이 볼 때는 등나무가 참 답답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으란 말이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까요? 칡이 경험한 세계에서는 그 방법이 더 유리했을 것입니다. 생존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유전자가 코딩되었겠지요. 누구나 스스로 경험한 것을 진리라고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다른 환경에서도 적응하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감는 것이지요. 등나무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입니다. 분명 등나무가 살아난 환경에서는 왼쪽으로 감는 것이 유리했을 것인데요. 자꾸 오른쪽으로 감으라는 칡이 황당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둘은 결국 각자의 방식대로 감기로 합니다. 그래서 오른쪽, 왼쪽 꼬이고 얽히게 된 것이지요.
“풀다가 도저히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자르세요.” 덩굴식물과 싸움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우셨는지, 아니면 자연 스러은 순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강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제 앞에 전정가위를 툭 놓으십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이렇게 풀어서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끝내 풀리지 않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끝까지 잡은 것을 놓지 않는 고집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요. 관계에서도 어쩔 수 없이 끊어내야 하는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살 풀어보려는 노력을 아무리 해도 끝끝내 자신의 생각과 이익만 주장한다면 안 되겠지요. 그런 사람은 가위로 잘라내는 덩굴의 끝과 같이 잘라야 합니다.
저는 한 때 자르지 않고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가능하면 모두와 잘 지내고 싶어 가 관계의 대원칙이었죠. ‘가능하면 최대한 친절한 사람이 되자’ 말입니다. 하지만 40년을 넘게 살아보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느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관계는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닌 상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타인에 의해 망쳐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제는 불가피하면 자르기도 해야 한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모두가 잘 사는 방법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덩굴이 잘라짐을 통해 예쁘게 정리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게 되니 말입니다.
어느덧 덩굴 테라리움이 예쁘게 완성이 되어갈 때쯤, 강사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작품은 살아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덩굴이 자라 올라옵니다. 계속적으로 다듬고 관리해주셔야 합니다. “ 그러고 보니 본성은 어쩔 수 없는 일일테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칡은 계속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겠지요. 등나무는 반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아 올라갈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감기는 이해되겠지만 작품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된다면 과감한 자르기가 계속되어야겠지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지금은 자를 정도가 아니라 달래서 풀어질 관계였다고 하지만 본성은 달라지지 않기에 언젠가는 또 같은 문제로 얽히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관리’가 필요할 것입니다. 한 번의 정리가 끝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