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수경 Nov 30. 2020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 후에는

kbs명작 다큐 다르마 4부작 리뷰


  원래 불교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더 공부를 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든 계기는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웠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읽은 글귀였다.



이 글을 처음 보고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으며 곱씹고 외웠다. 언제나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있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하며 나를 괴롭혀서일까. 주변의 압박이 있을 때는 가끔 먼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행복한 근시안을 갖고 있어, 이 단단한 응어리는 과거의 잔여물들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에 아무리 곱씹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잠잠하다가도 불쑥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이 응어리들은 내 몸보다 커져 하루를 독차지하곤 한다.


묘사해놓으니 너무 어둡고 진지한 것 같지만, 가볍게 말해 ‘이불 킥’ 정도는 대부분 겪었으리라 생각한다. 너무나 끔찍했던 과거가 있다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게 위의 말처럼 간단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 때의 내 행동과 대처가 마음에 안 든다고 스스로를 너무 심하게 원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듯 하다.


지금이라도 정신차리라고 누군가 보낸 메시지 같았던 이 글귀가 다른 사람에게도 울림을 주었으면 한다.
 



명작다큐 ‘다르마’ 4부작 중 3편의 소제목은 ‘환생과 빅뱅’이다. 이 편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과, 빅뱅이 일어났던 과정을 연결 지어 설명해준다. 과학 설명 부분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우주가 형성되었던 빅뱅 초기의 물질과 현재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 똑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세계는 하나에서, 같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화면은 티베트 불교를 수행하는 승려에게로 넘어간다. 티베트 불교의 근본은 자비와 연민인데, 여기서 자비심이란 다른 사람을 해치는 마음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착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행하는 과정인데, 다큐에서는 이 자비심이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나를 태어나게 하고 양육해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우리는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강한 마음이 생기는데, 윤회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어머니가 있을 것이므로, 모든 중생들이 전생에 나의 부모였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다큐의 다른 회차에 비해 불교의 종교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 받아들이기에 장벽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회라는 개념을 대략적으로만 알고 받아들이지는 못한 상황에서, ‘팔천송반야바라밀다경’에 의하면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해야 한다니, 당장 뉴스에 범죄자만 나와도 글로 옮길 수 없는 욕을 해대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끝없는 아량과 해탈에 가까운 성정을 지녔다면 지금쯤 나를 따르는 제자가 벌써 신촌에서 이대까지는 줄을 섰을 거다.


그러나 다큐를 계속 보다 보면 티베트 불교가 중생들에게 주려는 메시지가 뚜렷하게 보인다. 바로 ‘평등함’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신, 혹은 어머니이고 아버지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이를 나와 동등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학기에 수강한 ‘불교철학사’ 수업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이런 것을 ‘동체대비’라고 한다. 나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관점에서 상대의 아픔과 기쁨이 나에게 고스란히 느껴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나의 경계를 허물게 된다.


나와 너의 경계를 없애는 것, 불교의 가장 핵심 개념인 ‘무아(無我)’는 사실 개인적으로 정말 와 닿지 않는 개념인데, ‘나’라는 것의 기준을 내 몸, 내 감정으로만 보지 말고 넓은 범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부처님의 중생을 고통에서 구원해주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하며 본다면 무슨 말인지 대략적으로 알 수는 있을 듯하다.
 


다르마 4편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는 3편에서 이어지는 동시에, 1편에서 나온 붓다의 유언을 마무리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참고로 다르마는 세계의 존재를 유지, 지탱하는 질서, 규범, 법칙을 의미하고 아비달마에서는 존재의 요소를 의미한다.)



4편에서는 독일의 한 수도원 신부님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모습과 한국에서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모습을 번갈아 보여준다. 신부님은 모두가 자기 안에 창조주의 일부분을 지니고 있으며,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은 내려놓지 못함의 또 다른 형태라고 말씀하신다. 자유와 진리는 분명히 하나이지만 내가 믿는 것만 진리이고 그 외의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며, 진리는 훨씬 크고 경계가 없고 사랑 그 자체인 하느님을 뜻한다고 한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어둠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께서는 어둠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어지니 주에게는 어둠이 빛과 같음이니라.’


종교가 없어 진리와 사랑 그 자체인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신부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얻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내려놓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월호 스님을 통해 되풀이된다. 스님께서는 이것이 ‘나’라는 애착, 분별심과 더불어 자기 중심에서 생각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결국 집착은 현재의 삶을 괴롭게 하고 진리를 마주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옳다는 것,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이 부정적으로 드러난 예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보이는 듯하다. 본인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니까 너의 생각을 고쳐야 한다는 태도에 고통받은 경험은 한 번쯤 있을테니 말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4년전쯤 전공 교수님께서 수업 중 학생들의 미래에 관한 조언을 해 주셨던 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50대 정도 되는 남자 교수님이셨는데, 한국 출산율이 많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사실 출산율이 낮아도 국가가 잘 돌아가게 하는 건 정치인들의 몫이니까, 여학생들은 자신의 꿈이 확실히 있다면 육아니 결혼이니 하는 것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셨다.

출산율 얘기를 시작하실 때 설마 수업시간에 출산장려를 하려나 지레 겁먹었던 게 우스워질만큼, 사람은 누구든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 얽매이고 안정을 추구하게 되니 여학생들이라고 해서 같이 공부한 남학생들에 비해 타협한 꿈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영국 유학 출신 엘리트 남성 교수님은 사실 직접 본 사람 중 손꼽는 기득권임에도, 일반적으로 남에게 강요하는 (듣기 싫은) 가치관에서 훌쩍 벗어나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겪었던 본인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생활 형태, 옳다고 강요하는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라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저 말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말이다.




한국에서 종교가 욕 먹는 이유 중 대부분은 그것이 도그마(일반적으로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으로 신봉되고 주장되는 명제, 출처 네이버 사전)적으로 통용되어서인데, 석가모니는 이를 미리 경계해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으로 보라고 한다.

뗏목은 강을 건너가게 해 주는 수단이지만, 강을 건너고 나면 버리고 떠나야하는 물건이다. 어떤 가르침도 결국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에 집착하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지 불교의 가르침에만 적용되지 않고 모든 종교와 신념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며 불교적 개념을 하나 더 소개하고 싶다. 초기 불전 전유경에서는 실존적 괴로움을 '독화살'에 비유한다. 독화살이 박혔을 때 현명한 행동은 무엇일까? 그것을 분석하기보다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뽑아내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괴로움, 자신의 독화살이 무엇인지 빠르게 자각하고 그것을 파기해 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권하는 것이다.

사유할 수 있는 동물로 태어나 실존적 괴로움과 질문에 맞닥뜨리는 것은 어쩌면 숙명이지만, 그것에 매몰되어 그것만을 생각한다면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본인도 그렇지만,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각자의 고민과 굴레가 있을 것이다. 이 글 전반부에서 강조하듯 집착하지 말고 빠져들지 말고, 그것이 무엇이든 빨리 파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이 아주 조금이나마, 일시적이라도 그 파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왜 몰랐던 것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