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순간도 쉬운 적이 없었다. 노력한 만큼만 딱 얻거나, 그만큼도 얻지 못할 때가 많았다. 행운 같은 건 내 팔자에 없었다. 동네 슈퍼 경품 대행사에도 휴지 한 번 탄 적 없다.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게 내겐 없었다. 남들은 잘만 가는 대학 입시조차도 번번이 실패하면서 내 인생에 '대학생'은 없을 줄 알았다.
남들은 내가 꽤나 남성들을 꿰차고 다닌 줄 아는데(이거 자랑인가요?@.@) 연애도 진절머리 나게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만났다. 밀당도 못 해 질질 끌려다니고, 분명히 상대방이 내가 좋대서 사귀었는데.. 결국 더 내가 집착하고 매달렸다가 차인다; 친구들은 '외모 낭비'라고 '인물값도 못한다'며 위로 대신 혀를 내두르곤 했다.
취업은 말할 것도 없다. 대학도 그렇게 힘들게 들어가서 그런가 취업이 쉬울 거란 생각은 꿈에도 안 했다. 아예 조금도 한치도 기대를 안 해서 그런지, 입시보단 취업이 나았던 것 같다. 그래도 졸업 1년 만에는 됐으니;
웬걸, 입사 4년 만에 디스크라니, 또 뭐야 도대체 이건. 나 평생 이렇게 통증 느끼며 살아야 해?
결혼식 올리고 5년 동안 아이도 생기지 않았다. 남들은 혼수로도 해가는데, 나는 첫 애도 못 가지는 동안 둘째, 셋째까지 낳는 친구들도 있었다. 간절히 바라는 내게는 아이가 오지 않고,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하거나 아이를 버리거나, 또 학대하는 부모들을 보면 그렇게 안타깝고 속상하고 화가 나곤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남들은 저렇게 행복하기만 한데, 왜 나는, 내 인생은 이렇게 구질구질하지?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선 늘 좋은 것만 주신다는 것"과 "합심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물론 예전에는 믿지 않았다. 누가 울고 있는 나를 붙잡고, "하나님은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주신대"라고 조언해주면 차마 입 밖으로 말은 못 꺼냈으나, "그 입 다물라"라는 신호를 계속 보내곤 했다.
내가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건, 힘이 들 때 펜을 드는 습관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칭찬받고 싶어 쓴 일기, 말은 못해도 내마음 알아주길 바랐던 꼬마
내가 처음 '글'이라고 써본 것은 일기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됐다. 일기를 꼬박꼬박 쓴 것은 선생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다.
매일 썼다. '참 잘했어요' 도장에 집착했다. 사랑과 관심이 늘 고팠던 나는, 그렇게 두 아이가 웃고 있는 보라색 도장과 선생님의 빨간 펜 리뷰를 기다렸다.
그리고 찾아온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방학. 방학 첫날부터 일기는, 당연히 안 썼다. 그리고 알았다. 내겐 제법 신기한 능력이 있던 것을. 개학 하루 전날, 30일이 넘는 지난날들의 이야기를 하루에 몰아쓸 수 있더라.
하루에 있었던 일을 서너 날의 일기로 나누어 쓰거나, 반드시 방학 때가 아니었어도 좋았던 일들 슬펐던 일들을 떠올리며 빠진 날짜의 일기에 채워갔다. 좋든 싫든 인상 깊었던 일들은 많았으니까.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깔깔 거리며 웃던 시절이고, 좋아하는 가수 얘기만 돌아가면서 써도 30일을 채우긴 충분했다. 팔은 아팠지만.
"기분이 참 좋았다. 내일도 재미있게 놀아야지.ㅇㅇ에게 미안하다. 내일부턴 그러지 말아야겠다. 사이좋게 지내야겠다. 00이 그래서 속상했다. 안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더 잘해야겠다"
뻔하디 뻔한 문장으로 끝나는 일기다. 문장은 유치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오늘 내가 했던 일들,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을 곱씹어보는 반강제적 훈련을 했던 셈이다. 칭찬받기 위해 썼던 일기지만, 그렇게 나는 짧게나마 매일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입으로는 못 뱉어도 글로는 담으면서 내 감정에 충실했고, 내가 누군지 늘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글이라는 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기자라는 직업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어릴 적 나는 말이 없었다. 부끄럼이 많기도 했지만, 워낙 집안 분위기가 말 많은 걸 싫어했다고 해야 하나. "양반은 과묵하다. 양반은 비가 와도 뛰지 않는다"는 가훈 아닌 가르침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각자의 삶에 충실하기로 하면서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컸다.
겨우 아홉 살, 겨울 방학이 시작될 무렵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 댁에 오게 됐다. 자주 할머니 댁에 갔기에 그날도 할머니 뵈러 가는 거니 했다. 그런데 한 시간 뒤 내 침대와 책상이 들어온다. 할머니 집에 내 방이 생겼다. 그럼에도 아무도 나에게 내게 닥친 변화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엄마는 볼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연락하고 만나요)
워낙 분위기가 엄한지라 물어볼 수 없었다. 조부모님과 아빠 표정으로 뭔가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로 짐작해야만 했다.
아홉 살짜리가 엄마와 떨어지면서 얼마나 많이 불안하고 초조했을까. 그런데 할머니에게 "엄마는 왜 안 와?"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거참 신기하다. 어떻게 말을 안 해도 그런 질문을 해선 안된다는 걸 애가 알까?)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이사 간다고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온 동네 친구들도 보고 싶었고, 학교도 곧 할머니 댁 근처로 옮겨야 할 텐데 전학이라는 것도 하기 싫었고..
그런 감정을 일기에 썼다. 물론 선생님이 보는 오피셜 다이어리 말고 다른 노트를 하나 마련했다. 열쇠와 자물쇠가 있는 비밀 일기장이었다. 그러나 항상 열쇠는 다이어리에 달아뒀다. 열쇠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사실 할머니 할아버지나 아빠가 봐주길 바랐다.
얼굴을 마주하고선 미주알고주알 내 얘기를 못하겠지만, "내 상태가 이래요. 지금 내 감정이 이렇거든요. 나 좀 봐주면 안 돼요?"의 마음을 담아 썼다.
초등학생이지만 나름 정제된 단어를 구사하려(?) 노력했다. 철부지가 징징대다는 느낌은 주고 싶지 않았거든. 일기장은 책상 위나 첫 번째 서랍에 아주 잘 보이는 곳에 늘 두고 다녔다. 실제 보셨는지 어땠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렇게 글쓰기는 습관이 됐고 취미가 됐다. 외로울 땐 내 얘기를 말없이 들어주는 친구가 됐다. 글을 잘 썼다고 장담은 못하나, 중고등학교에 가서 어떤 글을 쓰더라도 글쓰기에 거부감은 없었다. 질풍노도의 시절 갈피를 못 잡고 헤맬 때도 내 손을 꼭 잡고 이끌어줬다.
책을 거의 읽지 않고 자란 것에 비해 나름 글 좀 쓴다는 평가를 받았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내가 책을 엄청 많이 읽은 줄 안다. 절대 아니다. 대학생이 되면서 책을 미친 듯이 읽기 시작한 것일 뿐, 학창 시절엔 언어영역에서 접한 문학 비문학 읽어본 게 전부다.
일기만 꾸준하게 써도 재주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사건(?)이 있다. 삼엄하던 재수 시절, 논술시험 그것도 서울대형으로 모의 논술을 봤는데 전국에서 한자리 등수를 한 적이 있다. 6등이었나 9등이었나. 당시 서울대 논술을 본 학생이 전국에 단 10명뿐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지만, 그 성적표는 "공부는 못해도 글 쓰는 데는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자신감이 생겼다. 재수를 안 했으면 내게 이런 재주를 확인할 길도 없었겠지.
펜을 들고 노트를 편 뒤 가운데를 손으로 꾹 눌러 평평하게 만들면, 떠있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 느낌이다. 물론 PC로 쓰는 것도 좋다. 일단 팔이 덜 아프니까. (확실히 요즘엔 PC로 쓸 때가 많긴 한 것 같다. 브런치라는 플랫폼도 좋다. 새하얀 바탕을 채워갈수록 내 안에 세계가 무한 확장되는 듯하다. )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외로웠던 어린 시절 덕에 글이란 친구를 만난 것 같다고. 두서없는 이야기도 끝까지 들어주는 친구. 그 친구보다 더 멋진 친구들을 만나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어도 그 친구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 한결같음으로 나를 좀 더 나은 나로 만들어줬다. 나답게 살도록 항상 들어주고 믿어줬던 것던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잊지 말고 잃지 말라고 응원해 줬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거란 거,
그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엔 잘 되려고 지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내가 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설령 부정하더라도,
내가 썼던 기록이 증명해주니까.
잘 해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