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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취중잡담

대구 제조업 근로자 지인 H의 일상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

by iid 이드

※ ‘취중잡담(醉中雜談) - 술김에 적는 솔직한 이야기들’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지인들이 익명으로 참여해, 술자리에서나 나눌 법한 솔직한 생각과 이야기를 가볍지만 진지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입니다.



기계와 사람 사이에서 하루씩 버티는 삶


아침 8시, 공장 문을 열면 매캐한 분진 냄새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절삭유 냄새가 먼저 코끝을 찌른다. 지방 제조업의 풍경은 언제나 비슷하다. 1993년에 생산된 기계들이 아직도 덜컹거리며 돌아가고, 고장만 아니면 한숨부터 나오고, 기계는 왜 정년이 없느냐는 농담이 절로 나온다. 그 오래된 설비들 사이를 사람들은 오래된 조명 불빛 아래로 바쁘게 오간다.


나는 그 속에서 설비 보전을 맡고 있고, 사람들은 흔히 기계는 정직하다고 말하지만, 현장에서 보면 기계도 사람처럼 거짓말을 한다. 더위·추위·습도·바닥 레벨·주변 소음 같은 조건에 따라 기계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상태를 숨기거나 속인다. 여기에 설비 다루는 사람들은 자기 실수를 감추고자 “어제는 괜찮았어요”라고 반복하니, 결국 나는 매일 탐정이 되어 소리·진동·압력·전압·전류 같은 숫자 속에서 진짜 신호를 골라내야 한다. 아주 미세한 소리 변화나 진동의 흔들림 하나도 ‘곧 터질 거다’라는 메시지인데, 대부분은 귀찮아서 그 신호를 무시한다. “어제 괜찮았으니 오늘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 결국 더 큰 사고로 이어지고, 설비가 멈추면 사람들은 “갑자기 고장 났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계가 말했는데 왜 못 들었냐”고 묻는다. 사람과 기계 사이의 거짓들 속에서 진실을 찾아 헤매는 일이 매일 반복된다.


점검표의 날짜와 서명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고장 나면 네 책임’이라는 도장이다. 그런데 지방 제조업의 현실은 그 책임을 더 무겁게 만든다. 부품은 제때 도착하지 않고, 예산은 항상 부족하며, 새로운 설비를 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장은 오히려 “그거 멀쩡한데 왜 바꿔?”라고 한다. 그래서 고장이 나면 살리는 수밖에 없다. 20년, 30년 된 설비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일은 때로는 테이프로 붙이고, 때로는 낡은 회로를 억지로 살리고, 때로는 부서진 부품을 용접해 이어붙이는 과정이다. 대기업에서 일정 기간 돌리고 중고 매물로 던져버린 기계를 중소기업이 다시 가져와 돌리는 경우도 흔하다. 대기업은 계획에 따라 설비를 교체하지만 중소기업은 버려진 설비를 끝까지 쓰고 폐기하는 구조라, 사실상 나는 기계의 장례를 계속 미루는 사람에 가깝다. 그럼에도 기계가 다시 살아 돌아갈 때 느끼는 안도감은 크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다음 날 또 다른 설비가 주저앉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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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기계 고장보다 더 어렵다. 생산관리팀은 늘 “빨리 고쳐야 해요, 라인 멈추면 손해 커요”라고 말한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들도 이 환경에서 ‘빨리’가 얼마나 불가능한지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어느 순간 불려가서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는 소리를 듣는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기계를 직접 만져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중얼거린다. 인력 문제는 더 심각하다. 현장직은 20~30대가 드물게 있지만, 관리직 중간층은 거의 없고, 자리를 채우고 있는 건 대부분 40대 후반에서 50대 사이 사람들이다. 젊은 사람들은 힘들고, 위험하고, 냄새 나고, 미래도 안 보이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남는 사람은 결국 나 같은 사람뿐이다.


조직은 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기계는 제대로 된 관리체계도 없고, 기계를 교체해야한다 이야기만 나오면 직원부터 시킬 것처럼 말한다. 사장은 유튜브에서 제조혁신 영상을 보고 와서는 “우리도 저렇게 하면 되지 않나?”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그게 그렇게 쉬우면 다 성공했어요…”라고 웃는다. 그래도 시도해보다 안 되면 “내가 잘못 본 건가?”라며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이게 지금 지방 제조업의 현실이고, 모두가 그냥 버티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사실 이런 환경이 내게는 낯선 것도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사실, 나는 10대 때부터 이렇게 살아왔다 이런 환경이 갑자기 주어진 것도 아니고, 어느 날 문득 떨어진 운명도 아니다. 솔직히 말해 나는 10대 때부터 돈을 벌며 살아왔다. 20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도 소싸움 경기장에서 경비를 섰고, 시끄럽고 담배 냄새로 가득한 룸살롱 앞에서 새벽까지 문을 지켰다. 공사장 단기 일용직으로 불려 나갈 때도 많았다. 정말 없는 일 빼고 다 해봤다. 그럴 때조차 희망은 있었다. 몸이 고되고 잠을 못 자도 ‘언젠가는 올라갈 수 있겠지’, ‘오늘보다 내일은 낫겠지’라는 근거 없는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믿음 하나가 버티는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사는 게 버틴다는 느낌이고, 앞날을 생각하면 텅 비는 느낌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진다. 요즘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기분이다. 내일도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이나 가정을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다. 내 한 몸 먹고 살기도 벅차다. 이 월급과 이 노동환경, 이 몸 상태에서 결혼·가정이라는 단어는 감히 손댈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진다. 주변 후배들은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집 장만 얘기를 한다. 그 얘기들을 들으면 사람인지라 부러운 감정도 있지만, 내 상황을 떠올리면 마음이 툭 하고 내려앉는다. 이 업종의 미래, 이 지역의 침체, 언제 멈출지 모르는 설비들 사이를 오가는 나의 하루를 보면 ‘내가 가정을 꾸리는 건 사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온다. 그래서 관계도 깊게 만들지 않고, 미래에 대한 감정도 쉽게 꺼내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이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버티는 법은 오래전에 익혔고, 이제는 몸에 밴 생존 방식이 되었다. 좋든 싫든 이게 지금의 나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이 되면 다시 공장 문을 열 것이다. 어떤 날은 잔업이 사라져 공장 끝나자마자 배달 알바를 뛰고, 어떤 날은 새벽 6시에 출근해 밤 12시에 집에 들어간다. 어떤 날은 회식비도 못 받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고, 어떤 날은 사장의 유튜브 혁신론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한다. 기계는 늙고, 사람도 늙고, 조직도 늙어간다. 하지만 설비는 누군가 손을 대야 돌아가고, 그 누군가가 아직은 나이기 때문이다. 누가 대신해줄 사람도 없고, 이 일이 누군가의 생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나는 또 하루를 버티고 그 다음 하루를 넘긴다. ‘살아지니까 사는 것처럼’ 흉내 내듯 다시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계와 사람 사이에서 묵묵히. 그게 지금의 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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