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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내가 3억을 사기당했다

삶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by crux

‘너는 그걸 왜 믿었어?’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했다고 누군가에게 말했을 때, 아마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가장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스스로에게도 이 질문을 가장 많이 하게 될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걸 믿었을까, 하고 말이지요.


피해자들에게는 저마다 믿게 된 배경이나 상황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들 본인이 되지 않는 이상 제3자 입장에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나고 나서 한 발짝 떨어져 보면 미심쩍은 부분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왜 이처럼 ‘알면서도 당하게’ 되는 걸까요? 결국 그 까닭은 ‘믿을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저 또한 지금 와서는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했다는 게 명확하니 뒤늦게 아 이것도 이상했지, 그래 저것도 이상했어, 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 그 당시엔 이런 이상한 점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믿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질타를 합니다. 이게 참 흥미로운 부분인데, 다른 범죄보다 유독 사기 범죄의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겐 동정심들이 안 생기나 봅니다. 작정하고 사기 친 사람이 나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 대신 온갖 종류의 질타가 피해자에게 쏟아집니다. 바보냐, 등신이냐, 허구헌 날 조심하라고 그렇게 교육을 하지 않냐, 온통 경계심 부족했던 피해자의 태도만 탓하기 일쑤입니다. 혹은 걱정해 준답시고 속을 긁습니다. 나는 절대 남을 안 믿는다, 나는 끝까지 의심한다, 다음부터는 꼭 상의하라, 비수처럼 심장에 날아와 박히는 다양한 조언들이 난무합니다. 이쯤 되면 그러한 공격에 대항할 힘도 없어집니다. 본인의 행동에 대해 제일 후회하는 사람은 실은 피해자 본인이니까요.


저주라도 퍼붓고 싶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나’라는 사람을 그래도 이 지점에서 다시 바라봅니다. 남들보다 유난히 바보라서, 잘 믿어서, 보이스피싱 예방 교육을 덜 받아서 피해를 당한 걸까요? 그런데 어째서 나보다 더 금융에 대해 모르고, 순진하고, 보이스피싱이라는 단어의 뜻조차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인 걸까요?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부모와 친척과 친구들을 믿으며 자라났습니다. 누가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들을 믿었고, 이것은 어쩌면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하며 생존하기 위해 필요했던 중대한 요건 중 하나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남들을 믿도록 타고난 인간이, 살다보면 때로 그 믿음 탓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후천적으로 ‘가려서 믿으라’고 학습되지만, 사기 범죄가 점차 조직화․기업화되고 관련 직종 종사자였던 사람들이 범죄에 뛰어들면서 정확한 정보를 가려내기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그들의 거짓말이 허술했다면, 보이스피싱 예방 교육을 훨씬 많이 하고 있는 이 시점에 피해자가 줄면 줄었지 이토록 피해가 많아져서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고까지 표현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판검사도 사기 당한다, 은행원도 사기 당한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피해자의 개인적 성향이나 특성, 학벌이나 직업 등에 기인하여 ‘네가 이러니까 당하지’라고 비난하는 것은 단언컨대 폭력입니다. 그리고 실은 보이스피싱 피해는 이런 데 기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관점을 바꾸어, 사기범들은 어째서 사기를 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그들을 믿게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본질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이미 피해를 입었고 아직도 그 피해를 복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다행히 복구하는 과정 중에 제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중한 가치도 떠올리고 의미 있는 활동도 찾는 등, 그 과정이 괴롭고 험난하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께서는 부디 유용한 정보를 미리 아시고, 유비무환의 자세로서 향후 유사한 피해를 당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혹시라도 손쉽게 돈을 벌고 싶은 유혹에 빠져 사기 범죄에 가담하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남을 속이는 일이 결코 행복하지 않으며 그 나름의 고통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모쪼록 저의 이 경험담이 여러분의 삶에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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