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을 바꿀 때만 보이는 것
종종 물건을 살 때 기꺼이 사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는 경우가 있다. 만족감이 높아 사는 것이 아니라 대체할 것이 마땅치 않거나 급할 때 더욱 그렇다. 한 번은 회사 제품을 포장하기 위해 박스를 제작했다. 이전부터 다른 담당자와 거래하던 업체를 찾아가 한두 번 상담받고는 바로 주문을 넣었다. 박스 안에 들어가는 틀이 많고 복잡한데도 선뜻 제작할 수 있다고 해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런데 같은 박스를 약 1달 간격으로 추가 주문했는데 매번 재질이 바뀌었다. 더군다나 품목별로 납기가 늦어질 때가 생겨 여러모로 불편함이 생겼다.
다시 박스 틀을 제작할 초기 비용이 아깝고 알아볼 여력도 없어 그렇게 2년 가까이를 꾸준히 썼다. 그런데 2년 연속으로 업체 사정에 따라 단가를 올리자 뭔가 대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새 박스를 제작할 건수가 생겨 평가가 좋은 업체를 온라인에서 수소문했다. 알아보니 초기 비용은 물론 단가도 비쌌다. 이전에는 없었던 물류비용도 들었다. 그래도 상담하는 과정마다 확인할 것을 짚고 비용을 알려주는 절차가 전문적으로 느껴져 구매를 결정했다. 박스를 받아보니 전자제품 다루듯 꼼꼼하게 포장되고 제 때 딱 맞춰 오니 만족감이 컸다.
결국 이 사례를 참고해 기존 주문업체를 다른 곳으로 바꿨다. 비슷한 박스를 좀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을 찾았기 때문이다. 박스 하나를 구매하는 일도 이렇게 마음이 바뀔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박스를 판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자명했다. 나도 이 업체들처럼 물건을 파는 입장에 있으므로 남 일 같지 않았다. 물건을 사는 입장이 되면 금방 알게 된다. 상대방이 정말 나를 위해 물건을 만들고 파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인지 말이다.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업체는 설령 구매했더라도 정이 가지 않았다.
이 경험은 내가 했던 일을 되돌아보게 했다. 중고 제품을 재생산해 판매하는 일을 하면서 고객을 위해 타협하지 않아야 할 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업의 특성상 일정한 품질로 만들기 어려운 문제를 다시 생각했다. 이건 회사를 위한 논리였다. 돈을 내고 사는 고객 입장에서 적어도 이 정도의 품질을 갖고 있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채워야 했다. 그 뒤로 새 제품 수준의 외관과 성능을 기준으로 생산 공정을 바꿨다. 이 탓에 일은 늘고 버리는 부품도 많아졌다. 그래도 판매량은 꾸준히 늘었고 3년이 지난 후에 재구매하시는 고객도 생겼다. 나름 팬이 생겼다.
이것이 경영학에서 추천하는 이론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객 만족감을 높이고 구매 욕구를 높이는 과정은 마케터인 나에게만 매력적일 뿐이었다. 내부 동료가 함께 움직이도록 하려면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객 입장에서 불편하지 않도록 가족에게 추천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선하자고 설득했다. 그때 관점이 바뀌었다. 내부에 있는 사람조차 고객이 되자 개선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귀찮고 힘든 일에 대한 불평이 줄었다. 고객처럼 우리가 만든 제품이 값을 주고 살 만한지만 따지기 시작했다.
물건 파는 일이 아니라도 상대가 있는 모든 일에는 이와 같은 교훈이 필요할 듯싶다. 누군가와 소통하며 원하는 목적이 있다면 한 번쯤 그것을 받는 상대방 입장에서 바라볼 일이다. 관점은 방향성을 갖고 있다. 타인에게서 나를 향하는 방향으로 보고 듣고 느낀다면 이전과는 다르게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이 갖고 있는 불편이나 욕구를 마치 내가 그런 듯 느껴볼 여유를 갖는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데일 카네기가 인간관계론이란 책에서 상대방 감성과 필요를 이해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설득할 수 있다고 했나 보다.
진정, 단 한 번이라도
상대방의 심정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문제도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