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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May 27. 2020

박수가 필요한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자신만의 인생 무대에 서있다면

큰 아들의 첫 학예회를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난다. 5살 때였다. 하와이 전통 춤을 추는 사람처럼 허리에 잎사귀 모양의 장식을 달고, 배꼽이 보이며 어깨 뽕이 과한 윗옷을 입었다. 얼굴은 빨간 볼 분장을 하고, 머리는 사과 꼭지처럼 한쪽을 모아 고무줄로 묶었다. 그렇게 같은 반 아이 20여 명이 소위 귀요미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섰다. 행사에 참석한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환호하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었다. 뽀로로 애니메이션 음악에 맞춰 씰룩거리며 추던 춤이 워낙 재밌어서 이따금 집에서도 아이에게 재연을 부탁했다. 즐거운 추억이다.


그런데 사실 아이의 무대는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았다. 공연 전 연습 때는 춤을 잘 췄다고 하던데, 막상 당일에는 얼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신나는 음악이 켜져 있지만 우리 아이를 포함해 웃지 못하는 아이가 여럿 있었다. 특히 남자아이들. 꼬물거리고 통통거리며 움직이는 다른 아이 옆에서 로봇처럼 움직일 지라도 아쉽지 않았다. 그 날 아이는 관중석에 가득한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긴장하여 더듬댔던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끝까지 울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견했다. 행사 후 아이를 한껏 안아줬다.


그 날은 아이가 부모로부터 그저 칭찬과 격려를 받는 날이었다. 행사에 참석한 부모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동작과 복장을 준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다. 그 날 무대에서 얼마나 잘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긴장할 수도 있고, 무대 위에서 울 수도 있으며, 갑자기 커튼 뒤로 도망갈 수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아이를 보기 위해 참석한 가족들에게 추억이 됐다.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 앞에 서는 경험을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했다. 아이를 서 있는 것만 봐도 뿌듯했다.


아이는 갈수록 몰라보게 자랐다. 어느새 초등학교에 갈 때가 됐으니 시간이 화살 같다는 말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그때보다 다리는 길고 단단해졌고, 몸통과 팔도 굵어졌다. 얼굴도 짓궂은 어린이로 탈바꿈했다. 종종 자신의 팔에 있는 알통을 선보이고 옹골찬 허벅지를 만져보게 하며 자랑할 때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아이가 작은 변화에도 동기를 얻어 활기를 가졌으면 하는 아빠의 마음이다. 그것이 아이에게 도전 의식을 주고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배경지식은 육아의 기본이다. 그래서 틈만 나면 아이를 추켜세운다.


문득 아이를 보는 관점으로 나를 바라봤다. 평가나 비교하지 않은 채 쳤던 박수를 떠올렸다.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그 마음을 나에게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아온 만큼 경험했고 보고 들은 만큼 생각은 자랐으나 나에 대한 지지와 응원은 그에 반비례해 숨죽인 것이 현실이었다. 지금 내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기준들은 전부 후천적이고 외부적인 자극으로 생긴 것이었다. 물론 한 명의 성인이자 사회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다림줄일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 대한 마음을 인색하게 쓰도록 만드는 면도 있었다.


나를 기뻐했던 적이 언제였나 돌아봤다. 근래에는 주로 뭔가를 성취했을 때였다. 이직에 성공했을 때, 매출이 많이 올랐을 때 등등. 떨렸고 두렵고 초조했고 불안했으며 막막했던 순간을 통과했던 나에게는 선뜻 손 내밀지 못했다. 이런, 아빠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내 어떤 것도 박수받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오늘을 살면서, 내가 선 땅에서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사실 그 무엇보다 뿌듯한 일이 아니었을까. 잠깐 서서 소리 없는 박수를 치고 싶어 졌다.


오늘 생에 주어진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힘 있게
내일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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