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알고 있는 소중한 것을 돌아보며
누구나 소중한 것을 간수하는 장소가 하나쯤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일기와 글, 각종 자료를 모아 놓은 노트 애플리케이션이 그런 역할을 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을 들락거리며 내 삶에 느낌표를 주는 것들을 저장한다. 시간을 들여 쓰고 편집한 것들은 별도의 폴더에 형식을 갖춰 정리한다. 어느 순간 한 편의 글로 빛을 낸 것은 따로 표시에 두었다가 자주 열어본다. 거기서 발견했던 가치를 잊어버리지 않고자 노력한다. 내게는 이것이 보석만큼 귀하다. 남들은 잘 알 수 없는, 혹은 알더라도 찾기 어려운 그곳에 나만의 보화가 하나둘 쌓여가고 있다.
처음에는 이 곳이 중요한 장소란 것을 잘 몰랐다. 그저 가끔 메모하고 천천히 볼 것을 모아두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모으고 정리한 양이 많아졌다. 이것이 나에 대한 역사관이 아닐까 하는 대범한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는 몇 년 전 이맘때의 심경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 남기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당시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이따금 삶의 방향을 잃은 것 같고 잘 가는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 오랜 기록을 꺼내보았다. 지금보다 어리고 미숙했던 그 시절에도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통과한 내가 읽혔다.
그 경험들이 마음에 새삼스럽게 돋을새김 됐다. 모든 것이 내가 겪어낸 시간과 장소들이었다. 제각각 찾아온 고민의 언덕을 달음질하며 넘었던 덕분에 지금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모두 나만의 기억이다. 흡사 나만 먹을 수 있는 요리 같았다. 맛보고 난 뒤에야 풍미와 깊이를 알게 됐고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상이었다. 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나의 생명만큼 경험했던 과거는 일종의 원석이 됐다. 이것을 돌아보는 세공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 내가 얼마나 가치 있게 살고 있는지 깨달았다. 내 삶이 만든 '보석'이다.
늘 곁에 갖고 있었는데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이를테면 아빠로서의 정체성이다. 엄격하게 훈육했던 아버지와 달리, 내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가 되어주면 좋을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회사를 퇴근하고 나서도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육아와 가사의 부담을 감당하면서 시나브로 지쳤던 날들 동안 번민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아빠가 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길이며, 나만 받은 선물을 하나씩 열어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나도 모르게 울었다. 내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단번에 깨달은 덕분이다.
내 삶의 가치가 갑자기 하찮아 보일 때 그 보석들을 이따금 꺼내본다.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은 초라함이 들거나 불현듯 찾아든 비교의식이 송곳처럼 마음을 찌를 때, 내가 가진 보석을 발견한 곳으로 향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돌아보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다. 이전의 나는 어쩌다가 머뭇대고 있는지, 그 상황을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를 분석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보다는 내가 어디로 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시선이 발 밑에 고이지 않고 먼 앞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보물을 엿본다. 뭔가에 마음을 담아 애쓰는 것을 알게 됐을 때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동생이 밤낮없이 대학원 연구실에서 씨름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마라토너의 심장이 떠오른다. 먼 거리를 달리게끔 온 몸의 모세혈관을 지탱하는 작은 동체가 멈추지 않도록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수를 보낸다. 맞벌이를 하며 지친 아내에게도,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는 처제에게도, 작은 회사의 팀장으로 고민 많은 후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을 거치고 만나게 될 그가 보고 싶다. 분명 세상 어떤 것보다 빛날 것 같다.
누군가의 보석을
찾아주고 알아봐 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