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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whale Jun 26. 2020

내가 가진 보석은 무엇인가

나만 알고 있는 소중한 것을 돌아보며

누구나 소중한 것을 간수하는 장소가 하나쯤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일기와 글, 각종 자료를 모아 놓은 노트 애플리케이션이 그런 역할을 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을 들락거리며 내 삶에 느낌표를 주는 것들을 저장한다. 시간을 들여 쓰고 편집한 것들은 별도의 폴더에 형식을 갖춰 정리한다. 어느 순간 한 편의 글로 빛을 낸 것은 따로 표시에 두었다가 자주 열어본다. 거기서 발견했던 가치를 잊어버리지 않고자 노력한다. 내게는 이것이 보석만큼 귀하다. 남들은 잘 알 수 없는, 혹은 알더라도 찾기 어려운 그곳에 나만의 보화가 하나둘 쌓여가고 있다.


처음에는 이 곳이 중요한 장소란 것을 잘 몰랐다. 그저 가끔 메모하고 천천히 볼 것을 모아두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모으고 정리한 양이 많아졌다. 이것이 나에 대한 역사관이 아닐까 하는 대범한 생각이 들었다. 이 곳에는 몇 년 전 이맘때의 심경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 남기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당시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이따금 삶의 방향을 잃은 것 같고 잘 가는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때 오랜 기록을 꺼내보았다. 지금보다 어리고 미숙했던 그 시절에도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통과한 내가 읽혔다.


그 경험들이 마음에 새삼스럽게 돋을새김 됐다. 모든 것이 내가 겪어낸 시간과 장소들이었다. 제각각 찾아온 고민의 언덕을 달음질하며 넘었던 덕분에 지금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모두 나만의 기억이다. 흡사 나만 먹을 수 있는 요리 같았다. 맛보고 난 뒤에야 풍미와 깊이를 알게 됐고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상이었다. 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나의 생명만큼 경험했던 과거는 일종의 원석이 됐다. 이것을 돌아보는 세공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 내가 얼마나 가치 있게 살고 있는지 깨달았다. 내 삶이 만든 '보석'이다.


늘 곁에 갖고 있었는데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이를테면 아빠로서의 정체성이다. 엄격하게 훈육했던 아버지와 달리, 내 아이들에게 어떤 아빠가 되어주면 좋을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회사를 퇴근하고 나서도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육아와 가사의 부담을 감당하면서 시나브로 지쳤던 날들 동안 번민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이 아빠가 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길이며, 나만 받은 선물을 하나씩 열어보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나도 모르게 울었다. 내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단번에 깨달은 덕분이다.


내 삶의 가치가 갑자기 하찮아 보일 때 그 보석들을 이따금 꺼내본다. 제대로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은 초라함이 들거나 불현듯 찾아든 비교의식이 송곳처럼 마음을 찌를 때, 내가 가진 보석을 발견한 곳으로 향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돌아보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다. 이전의 나는 어쩌다가 머뭇대고 있는지, 그 상황을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를 분석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보다는 내가 어디로 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시선이 발 밑에 고이지 않고 먼 앞길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보물을 엿본다. 뭔가에 마음을 담아 애쓰는 것을 알게 됐을 때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동생이 밤낮없이 대학원 연구실에서 씨름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마라토너의 심장이 떠오른다. 먼 거리를 달리게끔 온 몸의 모세혈관을 지탱하는 작은 동체가 멈추지 않도록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수를 보낸다. 맞벌이를 하며 지친 아내에게도,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는 처제에게도, 작은 회사의 팀장으로 고민 많은 후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을 거치고 만나게 될 그가 보고 싶다. 분명 세상 어떤 것보다 빛날 것 같다.


누군가의 보석을
찾아주고 알아봐 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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