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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윤의 해피레터 Oct 29. 2022

열여덟 번째 레터 : 햇살이들에게 미안해질 때

2022-10-09 발송 레터 


내가 근무하는 학원이 있는 곳은 사교육 열풍이 대단한 지역이다. 그렇다 보니 수업 때 힘들어하고 집에 가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햇살이, 조금만 힘내요. 곧 집에 가요.”라고 말을 하면, 백이면 백 “집에 가면 어차피 과외 있어요.(또는 숙제 있어요)”라고 아이들이 답한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수업이 밤 9시에 끝나는 야간반에 온다. 놀다 오는 게 아니라 이미 학원들을 순례하듯 돌고 와 저녁을 편의점에서 때운 뒤 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친구를 놀이터에서 사귀는 게 아니라 학원에서 사귄다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난다. 비록 즐거운 수업으로 만들어 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늘은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미안함을 느꼈던 순간을 모아 가져왔다.



1) 얼마나 더 잘 해야 하는데요?


우리 학원은 아이가 독서 감상문을 쓰면 그 글을 스캔에 본사에 보낸다. 그러면 본사에서 피드백을 해주는 식으로 첨삭이 온다. 잘한 글에는 ‘좋아요’나 ‘잘했어요’ 멘트가 같이 온다. 그 멘트가 오면 우리는 칭찬 스티커를 준다. ‘좋아요’가 별 네 개 정도의 평점이라면 ‘잘했어요’ 멘트가 별 다섯 개 최고 칭찬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연히 아이들은 모두 그 칭찬 멘트를 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실 학원 아이들은 모르지만, ‘좋아요’나 ‘잘했어요’ 멘트는 우리 학원 선생님들이 정해서 준다. (아이들은 칭찬 멘트가 본사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독 ‘좋아요’나 ‘잘했어요’ 칭찬 멘트를 너무 원하는 햇살이가 있었다. 우리 학원은 아이가 독서 감상문을 쓰기 너무 어려워하면 본사에서 제공하는 모범 답안 샘플을 참고하게 한다. 그런데 이 햇살이는 그렇게 하면 ‘좋아요’나 ‘잘했어요’가 안 나온다며 어려워서 끙끙 대면서도 30분 이상을 독서 감상문에 매달릴 정도였다. 어느 날 이 햇살이의 독서 감상문에 멘트를 달아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이 아이에게 ‘좋아요’를 줄지 ‘잘했어요’를 줄지 두 선택지 중에 고민을 했다.


햇살이가 ‘잘했어요’를 얼마나 받고 싶어하는지 알기에, 홧김에 최고 점수를 줄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글에 자신의 느낀 점이 더 들어가면 좋았을 것 같다’라는 이유로 ‘좋아요’를 주는 거를 선택했다. ‘좋아요’도 나름 별 네 개 짜리 점수고, 스티커도 주는 점수니까 이 정도여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햇살이는 오자마자 자신의 글에 피드백이 왔는지부터 확인했다. 피드백의 멘트가 ‘잘했어요’가 아닌 ‘좋아요’인 걸 본 햇살이가 울상을 지었다. 아이는 많이 상심했는지 피드백 종이를 저만치 밀어내며 볼멘소리를 했다.


“홈페이지 선생님이 제 글을 아예 안 읽으시나 봐요. 그냥 막 주는 게 분명해요.”


사실은 그 글을 읽고 피드백해주는 게 나였기에, 아이의 말에 땀을 뻘뻘 흘렸다. 햇살이가 크게 속상해 보여 내가 위로랍시고 이렇게 말했다.


“햇살아, 홈페이지 선생님이 평소에 햇살이가 글 잘 쓰는 거 아셔서 그래. 그래서 앞으로 더 잘 쓰라고 ‘좋아요’를 주신 걸 거야. 다음에 더 잘 쓰면 ‘잘했어요’ 받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아이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잘해야 받는데요?”


그 말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그래, 이 글이 아이에게는 최선을 다한 결과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날 수업에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햇살이에게 해주지 못했다. 햇살이가 해준 저 말은 그 뒤로 내 마음에 두고두고 남았다. 아이들의 글에 ‘좋아요’나 ‘잘했어요’ 같은 점수를 붙이니까, 아이가 자신의 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그날 받았다.




2)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었구나


한 햇살이와 <알렉스 스콧 레모네이드의 기적>이라는 책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사진 출처 : yes24

<알렉스 스콧 레모네이드의 기적>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동화책. 소아암에 걸린 알렉스는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돕기 위해 레모네이드 판매대를 열었다. 알렉스의 뜻을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알렉스는 레모네이드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세상을 바꾼 용기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이들은 어떤 일을 실천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이 책으로 아이들과 수업하는 걸 좋아한다. 왜냐하면 기부와 나눔은 어른들만 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햇살이들에게 ‘햇살이들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물어본 뒤에, 그걸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함께 폭넓게 고민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 아이들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 “옆 친구에게 친절하게 말해주기” “축구를 함께할 때 친구를 격려해주기” 이런 사소한 일들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해준다. 이런 작아 보이는 일들도 우리 아이들이 실천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려줄 때마다 기쁘다.


하지만 나를 이 수업에서 당황하게 만든 햇살이가 있었다. 한 햇살이에게 ‘햇살이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지’ 물어봤다. 많은 햇살이들이 어려워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고민하느라 이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게 오래 걸린다. 그런데 이 햇살이는 망설임 없이 즉시 대답했다.


“학원이 다 없어져 버린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그 답을 듣고 당황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원래는 ‘따뜻한 세상을 원해요’ ‘친절한 세상을 원해요’ ‘좋은 세상이요!’ 식의 대답을 들으면 그 세상을 위해 햇살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물어보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그런데 ‘학원이 없어져 버린 세상’을 원한다니. 아무리 그래도 학원 선생님으로서 ‘세상에서 학원이 사라지려면 햇살이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물어보기 참 난감했다.


그 뒤로 어떻게 수업을 진행해 나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햇살이가 내게 해준 대답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대다수의 햇살이들이 어떤 세상을 원하냐고 물어보면 잘 대답하지 못한다. 그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햇살이는 그 질문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을 했다. 학원이 없는 세상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으면 그렇게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었을까. 나도 그날만큼은 햇살이가 바라는 세상이 햇살이에게 꼭 오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3)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동화책을 읽은 날이었다. 그 책을 읽은 햇살이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


“햇살이는 어떨 때 부모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나요?”


그 말을 듣고 햇살이는 망설이더니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님이 저를 사랑하시기는 하는데, 저는 부모님이 싫을 때도 있어요.”


당연히 누구나 다 그런 감정을 느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햇살이에게 공감해준 뒤 어떨 때 햇살이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물어보았다. 햇살이가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말했다.


“공부를 너무 많이 시키는 거요.”


“그럼 햇살이는 공부 안 해도 되면 뭐 하고 싶어요?”


“그냥 놀고 싶어요. 놀고 싶고, 자고 싶고......”


“마음껏 놀면 정말 신나겠다! 그럼 햇살이는 특히 뭐 하고 놀고 싶어요? 뭐하고 놀면 행복할 것 같아?”


그 말을 듣자 놀 상상만으로도 기뻐 보이던 햇살이가 멈칫하더니 고민에 빠진 얼굴을 했다. 오래도록 곰곰이 생각하다가 약간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해서, 뭘 하고 놀아야 행복할지 잘 모르겠어요”


참고로 이 햇살이는 아홉 살이다. 아홉 살이면 한창 뛰어놀아야 하고, ‘뭘 하면 재미있을지’ 생각만으로 두근거려야 하는 나이 아닌가. 그런데 어릴 때부터 공부만 해서 뭘 하고 놀아야 행복할지, 재밌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아팠다. 가만히 교실 뒤로 가서 햇살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에 큰 의자에 앉아서 발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채로, 집중해서 글을 쓰느라 목을 숙이고 있는 햇살이. 아홉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저 자세 그대로 클 햇살이가 저절로 그려져 마음이 답답했다.


사실 이거 말고도, 햇살이들에게 미안했던 순간은 이 글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수업 때 조는 햇살이의 태도를 지적하자, 잠을 깨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서 나를 너무 놀라게 했던 햇살이나, 한 햇살이에게 “햇살이는 언제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나요?”라고 물었을 때 “아빠가 학원을 끊어주실 때마다”라고 대답했던 일도, 매주 일요일에도 놀고 싶은데 영재 수업반에 참여해야 한다고 시무룩하게 말하던 햇살이까지...


올해 화제의 드라마였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면 에피소드 9편에서 어린이 해방군 방구뽕 캐릭터가 나온다. 그 에피소드를 보면 아이들이 과도한 사교육에 어떻게 시달리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 저녁을 편의점에서 때우는 아이들, 맥도날드에서 학원 숙제를 하며 다음 학원 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


방구뽕 에피소드가 ‘어린이 유괴’ 사건을 미화할 여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 게 반가웠다. 실제로 이렇게 학원가를 챗바퀴 돌리듯이 돌며 지내는 아이들이 지금 여기에 너무나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위해 과장이 지나친 것 같다는 평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사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나는 이게 과장이 아니라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



1. 어린이는 지금 당장 놀아야 한다


2. 어린이는 지금 당장 건강해야 한다


3. 어린이는 지금 당장 행복해야 한다


방구뽕의 이 규칙이 마음에 울림을 주는 건, 실제로 우리나라 아이들이 ‘지금 당장’ 놀 수 있고, 건강하고, 행복한 어린이가 적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른들은 누구나 어린 시절을 거쳤을 텐데도, 지금 주변에 이렇게 못 지내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잊는다. 우리는 그 사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을 거다. 아홉 살 햇살이의 대답을 듣고 퇴근을 하며 나도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내가 뭘 해야 행복한지는 대학생 되고 나서부터 찾아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고.


학생 때는 입시를 위한 일상이 너무 우울해서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을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매일매일 주말도 없이 일 시키면 다 같이 파업을 할 텐데. 대한민국 학생들은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지?’


이런 생각을 했었던 적도 있었으면서. 수능을 보고 대학생이 되자마자 나는 대한민국의 학생들의 삶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한참을 잊고 살다가, 7년의 세월이 지나 학원 선생님으로 일하게 되어서야 그 아이들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이들에게 사교육의 무게는 더하면 더해졌지 덜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학원 선생님 일을 하며 돈을 버는 내가 방구뽕 같은 ‘어린이 해방군’이 될 수는 없을 거다. <알렉스 스콧 레모네이드의 기적>을 읽으며 아이들에게 던졌던 질문을 이제 나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차례였다. 그렇다면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무엇일까.


“허용이다. 아이들에게 허용할 수 있는 선택지를 조금씩 늘려가고 아이들이 결정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허용을 하지 않으니 양육자와 아이들이 서로를 계속 비끄러매게 된다. 서로 붙잡으려 하고, 못하게 막고, 어긋나는 것이다. 해방은 아이들한테도 어른들에게도 필요하다. 해방은 해방군이 와야 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허용해줄 때 온다고 생각한다.”

20년 놀이운동가 “방구뽕은 어린이 해방군 아냐”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7380922&code=61172211&stg=ws_rank


기사에서 이 부분을 읽고 내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웠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오늘 하루 학원의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순서대로 착착 알아서 해주면 좋겠지만, 아이들은 당연히 그럴 수 없는 존재다. 아이들은 커리큘럼을 하다 딴짓을 하기도 하고, 물을 마시고 오겠다고 하기도 하고, 갑자기 순서를 뒤집기도 했다. 전에는 하나하나 다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하며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순서를 잠시 바꿔도, 물 한 잔 마시고 와도, 잠깐 아이가 멍을 때려도 큰일이 나진 않았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평소에 상대가 무언가를 하지 않기를 바라면, “~해주시겠어요?/하지 말아주시겠어요?”라고 정중하게 부탁한다. “하지 마.”라고 쉽게 명령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아이들에게 “안 돼”라고 자주 말하는 건, 아이들이 내가 통제하기 쉬운 대상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학원은 4가지의 코스를 따라 책을 읽으면 레벨업을 하는 구조다. 1코스에서는 주로 인문/문학책을 읽히고 2코스에서 사회/과학/예술 책을 읽게 된다. 한 햇살이가 고학년인데 나이에 비해서는 낮은 레벨 책을 읽고 있어서 빠르게 레벨업을 해야 했다. 1코스를 달성하고 내가 햇살이에게 말했다.


“햇살아 1코스 달성한 거 축하해! 이제 2코스 되면 사회랑 과학책 읽자.”


라고 말하자 햇살이는 바로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사회랑 과학은 싫은데.. 인문이랑 문학책만 읽고 싶어요. 인문이랑 문학책만 읽으면 안 돼요?”


빠르게 레벨업을 해야 하는 아이였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안 된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도 아이는 계속 자신의 생각을 꺾지 않았다. 그 햇살이를 설득하느라 실랑이를 하는 걸 보고선 한 햇살이가 말했다.


“선생님, 그러면 저 오빠는 인문책이랑 사회책이랑 섞여 읽히면 안 돼요? 그러면 되잖아요.”


그 말을 듣자 싫다고 투정을 부리던 햇살이도 잠잠해졌다. 곧바로 얌전해진 햇살이에게 ‘햇살아 그러면 인문 책이랑 사회 책 번갈아 가면서 읽을래?’ 라고 물으니 아이는 순순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좋은 책을 많이 읽히는 학원인데. 2코스를 진행하면서도 중간중간 인문이나 문학책을 읽히는 게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 혼자 조급해져서 아이에게 무조건 안 된다며 통제를 하는 것이었다. 그날 선생님인 내가 햇살이에게 많이 배웠다.


마지막으로 내가 햇살이들에게 해야 할 일 중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존재 자체로 사랑해주는 것’이다. 박종호 작가의 소설집 <엄마는 파업 중>에는 단편 소설 ‘나는 너를 사랑해’가 들어있다. 어릴 때 읽었다면 감흥이 없었을 내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이 동화를 읽어보니 가슴에 맺히는 구절이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한 학부모님이 수업을 참관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조용한 수업 분위기를 망치고, 장난을 치는 한 개구쟁이가 반에 있었다. 학부모님은 그 아이를 선생님이 어떻게 지도하실지 예의주시한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아이들을 배웅하며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인사와 칭찬을 건네고 안아주신다. 학부모님은 선생님이 개구쟁이에게는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하며 바라본다. 개구쟁이의 차례가 되자 선생님은 그 아이를 안아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


동화 속 학부모님 입장에서는 선생님이 그 개구쟁이에게는 오늘 수업에 대해 해줄 칭찬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그 아이가 오늘 잘했든, 못했든 선생님은 그것과 상관없이 아이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해준 것이다.


우리 햇살이들은 이미 평소에 많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수학 학원에서, 영어 학원에서, 축구 학원에서 심지어 우리 학원에서도 글쓰기로 평가를 받는다. 이런 평가들 사이에서 나는 말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전해줄 생각이다. 햇살이, 너는 그 자체로 반짝반짝 빛난다고. 그런 너를 사랑한다고.




Q.

아이들이 어떤 세상을 꿈꾸며 자라기를 바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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