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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Sep 27. 2021

꿈꾸던 출근길, 그때 미처 누리지 못했던 것들

'백 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을 읽고

오늘은 좀 망했지만, 내일부터는 오늘 몫까지 정말 아끼고 또 아껴서 십만 원짜리 적금을 하나 더 부어야지. 그래서 내년 여름엔 이탈리아 여행을 가야지. 숄더백을 한번 추켜올리고, 한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채로. 새로 산 구두 굽 소리가 경쾌했다. p164 [백 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장류진]


내가 생각한 출근길도 딱 이러했었다. 십만 원짜리 적금 같은 것이 아니라 대학시절 배운 다양한 금융상품을 구체적으로 골라 재테크 목표도 야무지게 세웠고, 대학시절 즐겨보던 잡지에 나오는 에디터들처럼, 어떤 옷과 화장품을 사야 내게 어울릴지 매일 상상해보곤 했다. 7센티 하이힐이 좋을지 5 센티면 적당할지, 펜슬 스커트가 더 전문적인 느낌을 줄지 아무래도 바지 정장이 더 카리스마 있을지. 그중에 고민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한 손에 든 아메리카노. 출근길에 아메리카노는 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대학 4학년 때는.


취업은 아무나 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도 내가 감당할 만한 적당한 노력을 하고 적당한 실패감을 느끼며 다시 고만고만한 선택지를 알아봤는데 장류진 작가의 단편 '백 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의 주인공은 얼마큼의 노력을 했을까 헤아려본다. 장류진 작가는 백 한 번째 이력서라는 걸 엄청난 노력의 뜻으로 지은 제목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텐데. 나는 많은 곳에 이력서를 썼다는 게 같은 깊이의 노력이 아니라는 걸 안다. 대충대충 회사 이름만 바꿔 지원해 본 경험이 많았으니까. 주인공이 나 같았을 거라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어쨌든 주인공의 출근길만큼은 축하해주고 싶다. 백 한 번째 이력서보다 '정규직으로 출근하는 첫 번째 직장'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고 계약직으로 회사를 다니며 틈틈이 지원한 공채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자조 섞인 마음에서 나의 마음을 만났으니까.


나 역시 인턴이라는 이름의 계약직 시절이 있었다. 인턴이나 계약직이나 일시적 고용상태라는 의미는 같았는데 인턴이라고 부르면 견딜만했다. 그렇게 몇 군데 인턴 시절을 통해 불안한 고용상태나 어중간한 회사 이름에 더는 기댈 수 없겠다 싶은 시점에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렇다 할 첫 출근의 기억이 없다. 인턴이라는 이름의 계약직 출근길은 이게 현재 내 모습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굳이 기억하지 않았고 공무원 합격 후 첫 출근은 이미 여러 날 실망과 희망의 온도차를 경험해서였는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비록 이 단편의 주인공의 사정이 월급에서 이것저것 떼고 나면 남는 돈이 35만 원이었고 앞으로 교통비 포함 하루 만천 원씩 쓰는 게 목표라는 점에서 숨이 턱 막히겠지만 '출근을 하는 것일 뿐인데 왠지 한남동과 재규어와 이탈리아까지 내게 한결 가까워진 느낌'을 선물 받았으니 그 순간은 행복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출근 첫날의 경쾌함이 보기 좋았다.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과 현실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사회초년생. 실컷 월급 계산하고 하루 만천 원씩 쓰자고 목표를 잡았으면서 출근길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4,500원을 지출하고 일찍 출근하고 싶은 마음에 택시까지 잡아탄 주인공을 나무라고 싶지 않다. 그때만 누릴 수 있는 설렘과 아기자기한 계획을 응원해주고 싶다. 첫 출근한 직장에서 금세 실망할 것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내년 여름에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며 잘 버텨주었으면 한다. 아니 잘 버티지 않아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견디지 않아도 될 것들을 애써 참고 견디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매일 만 천 원씩 쓰지 말고 며칠 모아서 친구들이랑 그럴듯한 장소에서 인스타그램용 사진도 찍고 허세도 좀 부리고 그때만 누릴 수 있는 기억을 차곡차곡 잘 쌓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의 20대는 늘 무엇을 흉내 내고 바라기만 했지 온전한 무엇이 되어 누리지 못한 것 같다. 어려웠던 시절은 아니었으나 늘 취업 이후에, 좀 더 안정된 이후에, 라는 말로 행복을 유예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어쩐지 쪼그라든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잘 펴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가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잘 모른 채 잡지 속에서 보던 직장인 여성들과 내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구나. 돈을 번다는 건 노동이구나. 하는 생각들도.


이런저런 날을 지나 이제 직장생활 14년 차. 월급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아졌고 돈을 번다는 건 노동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14년 차가 됐을 때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나를 미워하고 때로는 인정하면서 사이좋게 쌓아온 생각들이다. 그러니 미리부터 10년 후의 모습을 생각하며 직장인으로의 삶에 몰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현재를, 자신의 모습으로 마음껏 즐기기를.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것저것 경험한 닳고 닳은 직장인이 저절로 될 테니 말이다. (악담은 아니다. 직장인의 삶을 계속 살아가시는 분들에게 드리는 응원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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