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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한밍블 Dec 27. 2022

너의 주머니에 달고 따뜻한 것을 넣어줄게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일 때, 존재만으로 우주를 얻은 것처럼 행복해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보라고, 너의 존재는 결코, 작지 않다는 말을 삶 전체에 써서 보여주고 싶었다. 이성적인 사고가 먼저인 삶을 살았기에 표현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상처를 줄까봐 임신한 순간부터 수신자가 아이인 편지를, 일기를 썼다.


모든 일상의 축을 아이에게 놓고 살았던 시간을 온전히 전할 수 있다면 이후의 내 부족함이 가려질 것 같았다. 공감보다 논리가 앞서는 성격 탓에, 의도치 않게 상처 주는 날이 많을 것 같아 미리 사과의 편지를 마련한 셈이었다. 쓰는 동안 내내 행복했고 다시 볼 때도 행복한 그런 글을 꽤 오래 썼다. 10년 후, 아이가 받아 볼 표정을 그리며 내가 더 설렜다.     




2012.12.5. 수요일     

뽀뽀야, 벌써 12월이다. (뽀뽀는 소망이의 태명이다.)     

오늘은 올겨울 처음으로 눈을 본 날이야. 서울엔 이미 첫눈이 왔다고 했지만, 엄마 아빠는 오늘 처음 봤으니까 오늘이 첫눈이라고 생각해. 너도 처음 봤지? 눈이 많이 온다.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눈 구경하면서 책 보려고 카페로 나왔어. 이 순간이 행복해. 뽀뽀야. 엄마는 요즘 너무 행복해. 뽀뽀가 있어서 그리고 아빠가 엄마를 너무 사랑해 주어서. 책을 보고 있는데, 산모가 애를 낳는 것도 고통이지만 좁은 산도를 빠져나오는 아이 역시 편안한 자궁에서 쉬다가 처음으로 고통을 겪는 거래. 뽀뽀야 지금은 편안하니? 아직 세상에 나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잘 쉬다가 우리 함께 노력해서 즐거운 순간을 누리자. 사랑한다 뽀뽀야.


     

이 일기를 쓴 날의 장면과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노원역 엔젤리너스였고 바깥의 찬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드는 자리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사방이 고요한 카페에 나홀로 앉아 있으니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던 날이었다. 눈이 많이 쌓여서 출근을 했다면 고생 좀 했겠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하니 추운 겨울 카페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벅차게 감사했다.


카페에 혼자 있었지만, 아이에게 이야기하듯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아이가 내 옆에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이날 읽었던 산도를 빠져나오는 아이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출산할 때까지 기억에 남았다. 잊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처음 겪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어 뽀뽀에게 우리 서로 같이 노력하자는 이야기를 틈날 때마다 했다.     




어느덧 출산의 날이 찾아왔다. 힘주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변을 보는 것처럼 힘을 주라는데 극한의 상황에도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아 도통 그런(변을 밀어내는 듯한)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산모님! 이러면 아기가 힘들어요. 힘주셔야 해요! “ 아이가 힘들다는 간호사의 말에 퍼뜩 산도에서 고통받는 뽀뽀가 생각났다. ‘뽀뽀야, 해보자! 우리 같이 노력하기로 했지? 엄마도 해볼게!’ 민망함보다 아이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강하게 힘을 주었고 힘을 줄 때마다 뽀뽀 역시 아래로 밀려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내 박자를 알고 있다는 듯이 뽀뽀는 하나, 둘, 하나, 둘 호흡에 맞춰 찰떡같이 내려왔다.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뽀뽀가 빨간 얼굴로 초록 천에 쌓여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감격에 겨워 소리 내 울었다. 여느 산모와 다르게 희열과 통곡의  울음소리라 의료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아뇨 그게 아니고요오... 너어..무 반가워서요. 제가 낳은 거 맞나요? 생명이잖아요... 뽀뽀야, 네가 뽀뽀야... 나는... 너의 엄...마야......어어어엉엉엉엉!“      





김달님의 『우리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서』에는 부스럭 소리가 나던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그리워하는 친구가 나온다. 언제든 쓸쓸해지는 날에 손을 집어넣어 내게 남아 있는 것들을 만져 보고 꺼내 볼 수 있도록 따뜻하고 단 기억들로 호주머니를 채워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행복을 예감했던 자신의 기억처럼 말이다.


아이와 함께 자라는 시간, 그런 기억들을 차곡차곡 선물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첫 아이를 임신 한 순간부터 호주머니에 좋은 기억들이 차기 시작했다. 아이의 호주머니를 채우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전에 말이다. 그렇게 호주머니를 채워주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이가 되었다. 아이의 호주머니를 채우려고 할 때마다 내 주머니에 좋은 것들이 채워졌다. 어쩌면 앞으로 그런 날이 계속될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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