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 일상은 실수와 실패로 포화 상태다
과학철학자 홍성욱은 저서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에서 과학기술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소개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현대 과학기술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nonhuman) 사이의 네트워크이며 실험실에서 하는 활동은 인간이 비인간을 길들이는 행위이다. 실험실에서 발견한 숱한 비인간, 항체나 줄기세포 따위 중 바로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쓰인 것은 없다. 인간에게 이로운 조건을 찾고, 재현이 되는지를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마침내 비인간은 인간을 이롭게 한다.
다르게 말하면 실험실은 길들여지지 않는 비인간을 마주하는 곳이다. 야생 개가 사람을 문다면, 길들여지지 않은 비인간은 사람을 좌절시킨다. 실험실의 비인간이란 내가 실수하기를 바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디서 나를 함정에 빠트릴지 모른다.
어제는 냉동고에서 샘플 하나를 꺼내는데 하필 바로 옆 낮은 장 위로 떨어지더니 퉁퉁 굴러서 냉동고 뒤로 들어갔다. 툴툴대며 새로 만들었지만 이 정도는 기꺼이 받아줄 앙탈이다. 생쥐 수술을 할 때마다 수술 부품을 떨어뜨린다. 특히 쥐 머리에 들어가는 부품들은 쥐 발톱만 해서 한번 바닥에 떨어지면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나사를 찾다 보면 바닥을 더듬댄 시간, 더러워진 무릎, 나사 하나 만치의 금전적인 손해가 생긴다. 이 정도 방해도 귀여운 수준이다.
생명과학 연구실을 위협하는 비인간의 훼방에는 오염(contamination)을 빼놓을 수 없다. 애써 키운 세포에 곰팡이가 자란다면 몇 주를 키웠든 몇 달을 키웠든 무조건 버려야 한다. 자칫하면 오염은 옆 플라스크로, 실험체를 키우는 인큐베이터로, 실험실 전체로 퍼져나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실험을 중단하고 실험실을 소독해야 한다. 몇 년 치 돈·시간·노력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순간은 비인간이 시비를 걸었는데 어떻게 대처할지 모를 때이다. 나사는 새 것을 꺼내면 되고 오염 난 세포는 처음부터 키울 수라도 있다. 실험이 실패한 원인을 찾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서너 달 걸린 실험의 결과를 마침내 확인했는데 생각한 대로 나오지 않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막막하다. 이럴 때는 '트러블슈팅(troubleshooting)'이라고 하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처음부터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을 거친다.
과학자란 비인간에 닳고 닳은 인간들이라 처음부터 실험에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생길 법한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본 실험에 들어가기 전까지 하나씩 변수를 고정한다. 초보 과학도에게는 조건을 따지기도 앞서 통제할 조건이 무엇인지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크고 작은 비인간에 맞서가며 어린 과학도는 잔뼈 굵은 실험가가 된다. 과학계는 비인간을 애증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집단이라 함께 비인간에 맞서나간다. 학회에서는 끊임없이 문제를 논의하고,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해 연구 결과를 공유한다.
그렇다고 쉽게 패배할 비인간이 아니다. 오죽하면 실험의 기본 값이 실패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실험이 실패하는 원인을 끝내 찾지 못한 과학자는 실험 주제를 포기하기도 한다. 업계 용어로는 손절이다. 승리한 비인간은 다시 거대한 진리의 숲으로 숨으며, 자신을 밝힐 뻔한 인간에게 혀를 내두르리라. 과학자와 비인간의 전쟁은 인공지능이 연구를 대신할 날까지 계속된다.